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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신경전 등록일 2016.10.11 05:04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52


신경전                                                                                박복진

 

   나는 질서, 특히 그 파괴 행위인 새치기에 대해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나는 남의 순서나 권리를 존중하지만 내 것에 대한 남의 침해 또한 양보 못합니다. 이 일로 인해 여러 번의 충돌이 있었으며 오늘 오후라도 외출이 있어 또 그런 사단이 안 일어나리라고 장담 못합니다. 아내는 그런 경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눈감고 지나가라고 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고 많이 괴롭습니다. 그렇게는 사지 마라! 고 누가 내 몸속에 그런 전자칩을 넣어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의 당연한 전개지만, 나는 이 일로 인해 큰 다툼을 벌려, 이곳 양평의 읍에 못 가는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읍 입구 다리 앞 농협을 못 갑니다. 번호표 받고 내 순서가 되어 일을 처리하는 데 누가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응대하고 있던 그 여직원에게 말을 걸며 자기 일을 보려합니다. 그래서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렸지요. 여보세요, 내가 지금 번호표 받고 내 일 처리하는 것 안 보여요? 그러자, 이 사람은 아, 이것 잠깐 물어본 것 가지고 왜 그래요? 라고 하며 나를 괴물 보듯 해서 사단이 벌어졌지요. 주먹다짐까지는 안 갔지만 해당 여직원이 죄송하다고 하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린 내가 씩씩거리며 거창하게 이 나라의 질서 행태를 거론하자 지점장이 다가와 사과를 했습니다. 이 때 그 은행 안에 있던 고객들이 나를 향해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지요. 양평에 별난 놈 하나 더 왔네. 같은 이유로 철길 굴다리 지나 동물병원에도 못가고, 그 옆댕이 약국도, 읍네 초입의 농기구 판매소도 못갑니다. 할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경우에는 나는 차 속에 앉아있고 아내만 들어갑니다. 아내는 말하지요. 인자 토굴 파놓고 속에서 혼자 살아. 후 세상에서는.

 

   지난 주. 해외 울트라 마라톤 행사 관계일로 출국하던 인천 국제공항 출국 수속대에서의 일입니다. 내 뒤에 서 있던 아저씨 한 분이 정상적인 앞, 뒤 사람의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내 뒤에 너무 바짝 다가와 자꾸만 나와의 신체 접촉을 유발해서 신경이 몹시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내 앞 사람과 간격을 더 두고 느긋하니 서서 이 사람에게 무언의 항의표시를 했습니다. 성격이 몹시 급한 이 사람은 그걸 못 참고 나에게 자꾸 앞으로 더 땡기라고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뒤에 서있지 않고 아예 내 옆쪽으로 자기 몸이 반은 나와 있는 몹시 거북한 형국이었습니다. 참다못한 내가 결국 그 사람에게, ‘그렇게 바뻐요? 그럼 내 앞에 서세요. 그래봤자 비행기는 다 같이 탑니다 ’. 그러자 아래 바지단이 접힌 구식 양복을 입은 이 사람이 말합니다. ‘ , 줄은 앞으로들 바짝 서줘야 빨리가지. 바짝들.’

 

이렇게 바지단이 두 겹인 양복을 입은 이 사람을 내 앞에 서게 해주고 나는 이 사람과의 신경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어디, 네가 나보다 더 먼저 비행기 타나보자. 보안 검열을 하는 줄을 뱀의 눈으로 탐색하던 그 사람은 잽싸게 짧은 줄로 가 서서 나보다 일찍 끝냈습니다. 이제 조바심의 벼룩이 나에게 폴짝 건너왔습니다. 그 다음은 출국 수속인 법무부 출국 수속대입니다. 여권을 들고 긴 줄에 서있는 그 사람을 옆으로 바라보며 나는 자동출국 수속대에 가서 손가락 하나 대고 그냥 나왔습니다. 엄청 빨랐지요. 그 두 겹 바지단은 사전등록 출국신고 제도가 있는 줄을 아지 못했을 터이고, 알았다하더라도 그 요령을 읽고 해독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단정했습니다. 출국 수속대를 빠져나온 나는 일부러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길 기다려 그 남자가 수속이 끝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유리문 앞에 서있어 주었습니다. 춘향이에게 이도령이 불러준 노래가락을 개사해서 속으로 불렀습니다. 니가 누구를 앞서려드냐? 앵도를 주랴, 호도를 주랴? 대신 검색대 주랴? 수속대 주랴?로 바꿔서 흥얼댔습니다. 공항내의 면세점 코너를 돌다가 이 두 겹 바지단을 다시 만났지만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당연히 나와는 목적지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공항내 무인 순환기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맨 앞 칸 줄의 맨 앞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남자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순환기차가 정차하면 바로 이층 출국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입구가 어느 칸인 줄 잘 아는 나는 또 그 보다 앞서 에스컬레이터를 탔습니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를 잡고 아직도 아래에 서있는 그를 고소하게 내려다보았습니다. 어이, 두 겹 바지단, 오그라졌다가 쭈그러져 안 펴질 인생, 누굴 앞서려구? 라는 물음을 혀밑에 깔고서 말입니다. 탑승구 앞 대기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스마트 폰을 검색하다가 탑승시작 안내방송이 나와 수속대 쪽을 바라보던 나는 또 놀랐습니다. 그 남자와는 행선지가 같은가? 그 남자가 어느 사이 또 줄 앞쪽에 서있는 게 보였고 잠시 후 탑승이 시작되니 그 두 겹 바지단은 나보다 훨씬 앞에서 탑승교 앞으로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삭아 가던 내 분노의 등잔불 심지가 다시 위로 확 땡겨졌습니다. 그리고 사태는 역전, 그 남자는 50번 좌석 이후 승객 우선 탑승 안내를 무시하고 맨 앞에 섰다가 항공 지상 승무원의 제지를 받고 뒤돌아섰습니다. 나는 그 여승무원의 입 움직임을 통해 이렇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손님! 지금은 좌석번호 50번 이후 승객 우선 탑승입니다. 손님은 조금만 더 기다리셨다가 다시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면 그때 오세요, 네에. 감사합니다. 48번 좌석표 가진 내가 또 이긴 것입니다.

 

   나는 여기까지로 그 두 겹 바지단 남자와의 신경전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의 조급증은 어디서 발원하며 어디가 그 끝인 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도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하는 순서의 덫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가 참 걱정됩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외국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꼼짝없이 그 노예가 되어야만 하는 질서, 줄서기. 그걸 위반했을 때의 가혹한 대가를 어떻게 치루어야 할지가 남의 일이지만 정말로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이른 순서에 집착할 것입니다. 기내식도 더 빨리 먹어야 되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하기도 더 빨리 해야 되고, 입국 수속도, 탁송화물 찾기도, 공항 밖으로 나가는 출구 찾기도. 남보다 늦은 것을 참지 못하는 그가 어쩌면 뒤진 자기 순서를 앞당기려고 예정보다 하루나 이틀 더 빨리 귀국이나 안 할지 궁금한 마음으로 그를 다시 한 번 더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리삥삥 척하고 조금은 한산한 두등승객 ( 일등석 승객 ) 입구 쪽으로 가서 탑승권을 보이며 다시 이른 탑승을 시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어인 일인지 그 지상요원은 자비를 베풀어 왼쪽 입구가 아닌 오른 쪽 이코노미석 입구를 가르키며 그냥 앞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줄보다 무려 삼십 명이나 앞인 말도 되지 않는 순서를 허용하면서. 그가 밤색 PVC 끈 가방을 어깨에서 한 번 풀썩하며 의기양양 들어가는 모습을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하는 내 가슴에 확! 하고 다시 전의가 불타올랐습니다. 이제 두 겹 바지단과의 신경전은 도착지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지게 생겼습니다. 지금껏 50번도 더 가본 암스테르담 쉬폴 공항. 내가 거기서 당신 앞서는 것은 어렝이에 공기돌 나르기보다 쉽지. 헤이, 두 겹, 우리 둘이 한 번 갈 때까지 가볼까?



춘포

박복진

(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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