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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내 분이 넘칩니다. 등록일 2016.10.11 04:59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43




내 분이 넘칩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정년 퇴직 후 노후를 보내는 곳 일 순위라는 프랑스 남부 알프스 자락 에네시라는 호수

마을에서부터 이런 걱정은 조금씩 볼가져갔다. 맛있는 커피라고 생각하며 홀짝홀짝 마시다가 바닥이 가까워

단맛이 너무 진해진 커피, 알고 보니 설탕 덩어리 하나가 녹지 않고 침전되어 단 한 번 홀짝거림으로 지금까지

 마신 그 전체 커피 맛을 잃게 되는 것처럼, 이번 여행의 어느 날엔가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난 분수

모르게 너무 까불었다.

 

여행의 시작부터 우리 내외는 엄청난 량의 행복감에 젖었다. 뭇 사람들이 이탈리아가 아름답다고 하면서 정작

여정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려고 해서 그냥 훑고 지나간 것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이탈리아를 4년에 걸쳐 매년 조금씩 쪼개서 보았는데, 이번 동유럽 여행도 그런 식으로

일정을 잡고 시작했다. 즉 한 도시에서 최소 3일 이상을 묵을 수 있게 잡았다. 여행이 겉으로 보이는 모양인

성과, 교회와, 다리와 오래된 건물보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 속, 그 안을 깊게

들여다보고,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에 내 후각을, 어쩌지 못하는 나의 예술적, 낭만적 상상력을 갖다

대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진행은 순조로웠으며 과정은 만족으로 이어져갔다.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 뒤를 돌아가 골목을 보고

그 옆으로 더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 현지인과 내가 사네, 네가 사네, 맥주 한 잔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게 내가 여행지에서 지향하는 것들이다. 당연히 이번 여행지 곳곳에서도

새벽에 주변 달리기는 이어졌고, 마을 골목골목을 산책하며 남의 집 울타리 안에 걸린 빨랫감을 훔쳐보는

재미도 빼먹지 않았다. 체코의 강 블타바 Vltava 양안에서 새벽 달리기를 할 때, 동유럽 몇 개국 순방에 얼마,

라는 허울 좋은 숫자 놀음 관광이 아닌 것에 얼마나 감사했던가. 블타바 강에서 배를 타고 선상 관광시, 가지고

갔던 장구로 그 배위에서 굿거리 한 판을 쳐댔을 때, 관광객들로부터 긴 박수를 받았다. 이 때 나의 기분은

최상이었고 내 조국의 음악은 끝 모르게 위대했었다. 그걸 바라보는 아내의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도 덩달아

최고조였다. 진하게 보고 진하게 달리고 진하게 즐기고..

 

세 번째로 들렸던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는 고풍스러웠으며 길거리 카페 레스토랑은 완전 내

취향이었다. 그냥, 마냥 그곳에 빠지고 싶었다. 고국의 알량한 재산 다 정리하고 이곳에서 눌러 붙어 살 수는

없을까? 라고 자문도 해보았다. 도심 지하도 계단 앞에서 일인밴드로 연주하던 집시가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즉석에서 말을 걸어 이따가 호텔에 돌아가 내 장구를 가지고와서 둘이서 합동공연을 하기로 약속하고 나서

돌아서니 지엄한 아내의 일장훈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정신 좀 차려요? 뽕맞은 집시하고 뭘, 뭐 어째요?

합동 뭐시라고? 이 양반은 뭐가 좀 자기와 맞으면 똥 된장 구분을 못해요, 아죠, 어휴! 아쉽게도 집시와의

길거리 합동공연은 무산되었지만 끌탕만을 할 시간이 없었다. 또 다른 아름다운 것, 후지지만 낭만적인 것들이

천지인 이곳에서 왜 그것 한 가지에 집착을 할 것인가? 예술에 목말라하고 낭만에 환장한 내 눈은 또 다른

그 무엇을 행해 끊임없이 히번득거렸다. 반 미치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황홀한 시간이 무르익어가면서 유럽 여행시 꼭 조심해야할 지갑 간수의 긴장이 덩달아 무디어져가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비엔나로 이동하려고 부다페스트 정거장에서 기차시간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의

배낭에 소매치기의 능구렁이 같은 손끝이 밑에서부터 말아 올라와 지퍼가 소리없이 열리고, 그리고 내 지갑은

나의 소유에서 타인의 소유로 무단 이전되었다. 비엔나로 가는 국제열차 끝 칸에 올라타 좌석번호가 확인되고

좌정하려고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 종화 아빠, 왜 배낭 위 지퍼가 열렸어? 그리고

웬쑤같은 악마의 시간이 시작됐다. 허겁지겁 배낭 속 물건을 다 쏟아 붓고, 또 붓고 해봐도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당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의 원치 않은 전화질은 이어졌다. , 네 분실했어요. 그래요.

사용 정지를 요청합니다. 제 주민번호요? 결제은행명요? 비밀번호요? 분실시각요? 재발급은 귀국하고 나서요...

 

기차로 도착한 비엔나는 아름다웠다. 음악 테마 여행이나 TVSky Healing 프로그램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던 곳. 단순히 우리가 현재 이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곳. 길거리를 걸으면

저절로 내 귀가 열리어 모차르트가 반겨주는 곳. 내가 아는 모든 클라식 음악이 나를 향해 열병식 하듯 줄서서

반겨주는 곳. 그러나 내 수중에는 그것을 즐길 현실적 장치, 플라스틱 돈이 없었다. 남이 가져간 내 돈으로

음악회 입장권을 살 수가 없고, 길거리 카페에서 맥주를 마실 수가 없고, 슬프게도 비엔나 커피도 마실 수가

없고 멋진 사진도, CD도 구입을 할 수가 없다. 달랑 남은 뮨헨으로 가는 기차표와 그곳에서 대한민국 인천

공항으로 가는 항공권 사본만 있을 뿐이었다. 다뉴브 강까지 걸어서 갔다. 그리고 그곳 나무 그늘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얼마를 그랬을까? 안타까운 현실이 비애나 비탄과는 거리가 먼, 그것조차 낭만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에게 그런 변심능력이 있다는 게 정말로 고마웠다. 만일을 위해 준비해간 햇반과 멸치 고추장 볶음으로

다뉴브 강 둔치에서 아내와 행복한 점심을 들었다. 우리 내외의 얼굴에 다시 행복함이 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분명 계시일 거야. 우리에게 이곳 비엔나를 다시 한 번 더 오라고 일러주신 것일 거야. 우리가 이태리를

4년에 나눠 충분히 쪼개 보았듯, 이곳 비엔나도 한 번에 다 보려하지 말고 두 번, 세 번 쪼개서 나눠보라고

한 것일 거야. 내년에 돈 가지고 다시 오자. 그리고 그 때는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넘보는 이들을 위해 별도로

지갑을 준비하자. 그래서 그들에게, 그들이 이루어놓은 이 좋은 것들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떳떳하게 지불하자.

 그러면서 편한 마음으로 다시 즐기자. 이들은 내 지갑을 가져갈 권리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고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창조한 이들의 수고에 당연한 보상이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행복감이 이렇게 넘치고 있지 않는가?

나의 예술혼, 낭만감을 채워준 고마운 사람들. 호텔로 돌아오는 긴 거리를 걸으며 나는 아내의 손목을 꼬옥

잡고 볼에 입술을 갖다 대며 넘치는 분 한 방울을 홀짝 마셨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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