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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뜀객 등록일 2016.09.30 05:34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55




뜀객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가보자는 욕심과, 심청이 주는 고전적 냄새와 그리고 섬진강이 주는 뭔지 모를,

 방금 빨아서 빨랫줄에 휘영휘영 널어놓은 하얀 광목 빨래 같은 덜 세련된 담백함이 버무려져 있는 그곳 곡성.

그래, 가보자! 해서 심청 곡성 섬진강 마라톤에 참가하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간단한 뜀꾼 군장을 갖추고서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오고 있는 고속도로를 달려 남녘으로

내려간다. 마라톤을 찾아 괴나리봇짐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마치 칼싸움 상대를 찾아 검 하나 들고 삿갓

모자에 더부룩 턱수염 날리며 강가 갈대숲을 바람처럼 움직이는 검객 흉내를 내며, 나 홀로 남녘으로 간다.

-싸 하니 바람에 실린 파스 냄새를 찾아서, 비릿한 피 냄새를 찾아가는 검객 흉내를 내며 이 얼뜨기 서울

뜀객은 간다. 금새 어둑해진 얕은 산 구릉 너머, 목 벤 장검 위에 마르다만 인혈처럼 짙붉은 석양 노을은

이 얼뜨기 뜀객의 검객 흉내에 기막힌 장단을 보태준다.

 

   섬진강에 아침이 밝았다. 내 컴퓨터 모니터 위, 옆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3M 메모 스티커보다 더 노오란 색이

들판 나락 논에 가지런히 예쁘장하게 널러져 있고, 그 위를 질 좋은 망사 같은 새벽안개가 널어놓은 홑이불처럼

 얕고 넓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 망사 홑이불 밑에 눈이 시리게 맑은 섬진강이 흐르고 있고. , 마라톤

출발이다.

 

   나는 달린다. 강을 따라 달린다. 등 뒤 어깨에서 가슴으로 장검 하나 달랑 메고 스사사삭! 갈대 숲 헤집고

강변으로 다가가는 검객의 흉내를 내며 이 얼뜨기 서울 뜀객, 숨소리 삼키며, 구비구비 섬진강을 거슬러

모래톱 밟으며 바람처럼 간다. 마라톤을 달린다.

 

   길가 코스모스는 시집가는 날 새색시의 연지 곤지 색보다 더 곱다. 마을 동구 밖에 나와 박수 쳐주는

할머니의 빛바랜 꽃무늬 몸빼 바지, 부끄럼 모르고 환하게 웃는 잇속에 달랑 하나 남은 앞 이빨. 할머니는

서울 얼뜨기 뜀객의 눈물을 훔치는 재주가 있나보다. 뛰던 길 멈추고 나는 몸빼 할머니에게 덥썩 안겼다.

그러자 하나 남은 앞 이빨 사이로 헛바람과 함께 마라토너 내 귀로 전달되는 할머니의 사랑, “ 어여 가!

어여 가! 다들 버얼써 갔어! ”.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은 바라보기가 미안 할 정도로 푸르렀다. 콧속의 날숨은 들숨보다 더

상쾌해서 달리는 내 몸뚱이에 무자비한 질주 욕구를 쏟아 퍼 붓는다. , 섬진강! 내 조국 내 강토에 이렇듯

정토된 강과 들이 있었다니! 바라보기조차도 아까운 하늘이, 들쉬기가 아까운 공기가, 먹지 않아도 배부른

너른 들이 있었다니....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이 순간이 탈취될까 두렵다. 누군가가 이 강산, 이 가을을 앗아갈까 무섭다. 아니,

이미 앗아갔었던 그 자들에게 분노의 활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다. 어깨에서 장검을 쑤욱 빼들고

있을지도 모를 침입자를 찾는다. 침략자를 찾아 두 눈을 번득인다. 눈이 시리게도 아름다운 내 조국, 내 강산을

유린했던 왜인의 잔당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쉬지 않고 달린다. 복수의 칼이 청명한 가을 햇살에 튀어오른

연어의 비늘처럼 번득인다. 왜놈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이 땅이 어디라고 감히 쳐들어 왔더란 말이냐?

니노옴이 정녕 이토록 아름다운 이곳에 더러운 게다짝을 딛었더란 말이냐?

 

   나 뜀객은 달린다. 가을에 취해, 역사의 비극에 취해 이성 잃고 달린다. 임진년 란을 피운 짐승 같은 왜인의

목을 향해 장검 들고 역사를 거슬러 달린다. 그 때도 내 조국, 내 강산은 이렇듯 아름다웠을 꺼다. 도깨비 뿔

같은 투구를 뒤집어쓰고 금수만도 못한 훈도시 하나 달랑 차고 남해안을 상륙, 섬진강 이 물길을 따라 왜구는

말을 몰고 수레를 끌었을 꺼다. 거쳐 가는 동네마다 부녀를 유린하고, 수레를 끄는 백성은 바퀴에 깔리고

창검에 찔리고 왜구는 신이나면 검을 휘둘러 이 땅의 조선백성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인 조선백성의

목을 전리품으로 나무궤짝에 담아 굵은 소금을 뿌려 배에 실어 왜놈 포구로 노를 저었을 꺼다. 포로로

끌려가며 노젓는 동작이 굼뜨다고 백성은 또 목이 베여 현해탄 파도 위에 던져 졌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섬진강 물길을 따라 이유도 없고, 원인도 모르고, 단지 나라가 약해 침략을 당하고 있다는

통분만을 삼킨 채, 이 길 위의 조선백성은 눈을 뜨고 있다하여 목이 베이고, 눈을 감고 있다 하여 또 목이

베이고, 왜인의 승전 축배에 가락을 못 맞춘다하여 옷이 벗겨지고 배가 갈리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강산에,

이토록 예쁜 섬진강 물길 옆에 잘려나간 수급이 골짜기를 덮고 그 피가 냇가를 넘쳤을 것이다.

   얼뜨기 서울 뜀객은 간다. 왜인의 목을 찾아 복수의 장검을 빼들고 따닥따닥 게다짝 소리를 쫓아 복수의

검을 가슴에 품고, 이 얼뜨기 서울 뜀객은 달려간다. 하늘이 아름다워, 들이 아름다워, 산이 아름다워, 굽이굽이

금비늘 같은 물 반짝거림으로 환장하게 아름다운 섬진강 물길 따라 엉! ! 통곡하며 얼뜨기 뜀객은 달린다.

몇 놈 뒈져 나자빠지게도 징하게 좋고 또 좋은 섬진강 물길 따라서 이 얼뜨기 서울 뜀객은 달린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덧붙임: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섬진강 마라톤 코스를 달리며 저는 이 강산에 피를 부르며

그곳의 수많은 조선백성 목을 베여간 임진년의 왜인 침략자들을 떠 올렸습니다.

다시는 나라가 힘이 없어 그런 꼴을 또 당해서는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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