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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아, 이 요물이... 등록일 2016.10.11 05:21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68



, 이 요물이...                                                  

 

이리 저리 치이고 밀려다니는 구세대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접근성은 이제 많이 떨어졌나 봅니다. 그저 지금 있는 것 가지고 그냥 어떻게 비벼 나가면 되지 굳이 모르는 것에 대해 선뜻 손을 뻗혀서 사서 고생을 할 이유가 없는 게지요. 새로운 차를 사거나, 새로운 전기밥솥 하나를 사더라도 제일 무난하고, 제일 많이 알려진 검증된 것에로만 눈길이 가지, 좀 더 편리하다 던지, 좀 더 복합 기능이 있다는 이유로 값을 더 달라고 하며 손짓하는 제품에는 쉬이 손이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굳어진 사고방식 때문에 새로운 마라톤 용품이라고 하며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새롭다는 제품에 대한 저의 조기구매는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험을 할 만 한 돈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구매 능력은 있었다 하더라도 구매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니 제때 사게 될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마라토너들이 달릴 때 본, 뼈대는 팔뚝에 차고 가느다란 선을 따라가다 붙어있는 손톱만한 마이크는 귀에 꽂고 달리는 MP3 재생기에 대한 나의 소유욕은 남달랐습니다. 특히 미끈한 몸매에 색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다 들어난 시원한 마라톤 유니폼을 입고 달리시는 여성 주자분이 이 MP3 재생기를 팔뚝에 휘감아 매고 음악에 푹 빠져 달리시는 행복한 모습을 몇 번 본 이후로는 도대체 저것은 돈을 얼마큼 주면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 같이 거의 혼자서 뛰는 홀스람 ( 홀로 스스로 뛰는 사람 )에게는 이 기기가 대단한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백하건대, 이게 궁금해서 테크노마트라는 곳에도 한 번 가서 살 것같이 하며 진열대 안의 그 물건도 몇 번 훑어보았었지요

 

저녁 식탁에서 그것 있으면 참 좋겠다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몇 번인가 한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무슨 조그만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와 내 앞에 쑥 내미는 것 이었습니다. ! MP3 재생기였습니다. 항상 당신은 통이 너무 커서 무엇이든지 콱! 하고 사는 게 걱정이라고 핀잔하곤 하는 데 오늘은 그 큰 통이 정말 예뻐 보였습니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나에게 사 준다며 내미는 아내의 손이 참말로 예뻤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요. 이걸 그냥 전기에 꽂으면 원하는 음악이 줄줄 나오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음악을 어데서 갖다 넣어야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명서를 끄집어내어 펼치고 작은 글씨를 읽기 시작했으나 그게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더군요. 9시 뉴스가 시작 될 때 시작한 게 본 뉴스가 다 끝나고, 일기예보도 다 끝나가도록 터득을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팽개치며 하는 말, 에이! 조금 있으면 아들 제대하니 그 때 집에 오면 아들보고 해 달라고 하자!

 

그리고 한 달 하고도 반을 기다려 아들이 드디어 만기 제대하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해서 듣고 있었던 CD 들을 잔뜩 골라 아들 방 책상 위에 갖다 주며 얼른 이것들을 이 MP3 속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재주 인지는 몰라도 아들은 그 음악들을 금방 그 속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나는 그 MP3 재생기를 목에 걸고, 가느다란 줄 끝의 마이크는 양쪽 귀에 꽂고, 늘어진 줄은 가운데를 한 번 묶어 목 뒤에 오게 하고서는 뜀길로 나갔습니다.

 

오메 ! 이렇게 좋은 게 세상에 있었단 말입니까? 이 좋은 걸 여태 나만 모르고 살았단 말입니까? 손톱 보다 더 작은 스피커에서 쾅쾅 울려대는, 완벽한 좌, 우 분리 화음. 때로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음악 비이토벤, 또 때로는 저절로 두 눈이 감기는 감미로운 죤 세바스치언 박, 울창한 흑 삼림 광활한 사이버리어를 굽이쳐 흘러가는 몰다우 강 대 자연의 웅변 차이캅스키, 그리고 “...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나르는 솔개처럼..“의 우리 유행가 까지..

 

그런가 하면, 임의 재생 이라는 뜻인 것 같은 랜덤 기능으로 인해 지가 알아서 지가 이 곡, 저 곡 번갈아가며 선곡해 주는 덕에 또 때로는 강렬한 70년대의 반전 음악의 상징, 전기기타 선율이 안겨주는 뜨거운 심장 박동 같은, 장발족 클리던스 클리어 워터 리바이블의 가슴을 후벼파는 비트 음악까지도..

 

! 나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달림으로써 행복을 느꼈고, 귀가에서 울리는 음악의 황홀함으로 행복을 느끼었고, 그런 나를 축복해 주는 5월의 따스한 아침 태양 솟음을 보는 즐거움으로 행복을 느꼈고 그리고 부드러운 대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상쾌한 아침의 한 무더기 바람에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 요물이, 굵기가 내 손가락 두 마디 보다도 못한 이 요물이 나를 황홀경에 빠뜨렸습니다. 나는 절로 두 눈이 감기고,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지고, 내 딛는 두 발의 보폭이 음악에 맞춰 저절로 부웅! 하고 공중으로 치솟았습니다. 위대한 음악의 창조자시어, 나의 축복을 받으소서! 이 작은 음악 재생기로 내 아침 뜀질을 윤기나게 해 주신 이름 모를 발명자시여 내 감사를 받으소서!

 

오메! 이 요물이, 이 작은 요물이 나 같은 뜀 꾼에게 까지 찾아와서, 참말로 징그럽게 고마운 것이..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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