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군대 훈련소에 가서 훈련받다가 군복 단추 떨어지면 뒈지게 맞는다더라, 바늘을 골고루 가져가거라! 거기는 얼굴 닦는 수건도 안 준다더라, 수건도 가져가거라! 해서 집에서 정성스럽게 싸주어 가져간 대침, 중침, 소침 바늘쌈하고 송월 타올 왕수건, 얼굴 수건, 손수건은 군 입대 훈련소 정문 헌병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보따리까지 몽땅 빼앗겼다.
소집 시간에 늦을세라 새벽 밥 먹고 첫 버스를 타고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나는 훈련소 정문 헌병이 던져주는 싸리비로 정문 입구에서부터 위병소 주위를 뺑 돌아가며 한 시간여 얼떨결에 원치 않는 청소를 해야 했다. 빗질이 시원치 않다고 가끔씩 대가리 박어! 로 위병소 그 헌병의 심심풀이 노리개 노릇을 해가면서. 내가 왜 그래야 되는지 이유를 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내 신체 부위 중에서 대가리의 정수리 부위가 제일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가리 박어! 명령만 나오면 하늘이 노래진 나는, 그 기합 말고는 다른 어떤 기합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원하는 기합만을 골라서 주는 그런 친절은 대한민국 군대에 당초부터 없었다. 영리한 나는, 조금 있으면 대가리 박어! 기합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면 주위를 둘러보아 말랑말랑한 흙을 긁어모아 잽싸게 훈련복 바지 주머니에 가득 담았다. 그러다가 대가리 박어! 구령이 떨어지면 주머니의 흙을 꺼내 내 대가리 정수리 닿는 부위에 소복하게 쌓아놓고 그 위에 대가리를 얼른 가져다 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지만, 이 186 대가리 같은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요령을 피워? 으엉?? 이라는 조교의 발악이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은 다 끝났다. 그는 내 주머니를 뒤져 내 정수리에서의 베개 역할을 해야 할 그 마른 흙을 내 입속으로 처넣었다. 어머니 말고 내 입속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다른 이는 이 조교가 최초였다.
그렇게 살벌한 고통의 훈련소 입소 첫 하루가 지나가기 전, 나는 또 다른 육체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낮에 향도( 소대의 리더 ) 할 사람 자원해서 나오라고 하는 명령에, 아무도 나가는 사람이 없어 또 대가리 박어! 명령이 떨어졌다. 향도를 나가면 시범 케이스로 뒈지게 맞는다는 사실을 아는 훈련병들인지라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남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이 없는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다하며, 향도가 나올 때 까지 전 소대원 대가리 박어! 명령이 떨어졌다. 환장하게도 훈련소 입소 후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몇 십 번을 대가리 박어! 에 시달렸는지 나는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수리가 제일 약하고, 의지력이 제일 형편없었던 나는 대가리 박어! 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앞으로 걸어 나가 원치 않던 향도를 자청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낮에 외출 나갔다가 술에 떡이 되어 돌아온 훈련소 고참 기간병 병장은 이제 막 취침나팔 소리로 자리에 눕기 시작한 소대 내무반에 눈알이 시뻘건 저승사자 같은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그는 소대원 전원 기상! 이라는 깨진 꽹과리 같은 고함을 지르며 군화발 소리 요란하게 갓 입소 훈련병 내무반을 극도의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우리 훈련병들을 침상 일선에 정렬, 삼선에 정렬, 오선에 정렬 등을 정신 못 차리게 반복시키더니, 이 소대 내무반 향도 나왓! 이라는 귀신도 벌벌 떠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우스꽝스런 군대 내복에 맨발로 침상 아래 바닥에 내려가 차렷 자세로 섰다. 그는 군화발로 침상 위로 뛰어 올라가더니 관물대 위에 꽂혀 있던 야전 곡괭이를 집어 들어 불문곡직 나를 패기 시작했다. 이유는 딱 한 마디. 이 186 같은 놈들 오늘 다 죽이겠다는 것이고 그 시범 케이스로 향도 너부터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군대, 낼 모레면 제대하는 데 다 죽이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약간 반 사팔인 그의 눈은 그러서 그런가? 내가 받는 공포심은 더 가중되어 눌려졌다.
그 고참 병장의 미쳐 날뛰는 야전 곡괭이에 나는 순종도, 저항도, 방치도, 아무것도할 수 없이 그냥, 그저 내 몸을 그 곡괭이 앞에 내놓았다. 낮에 물로 대청소를 한 내무반 시멘트 바닥의 물은 아직도 흥건하게 괴어있었다. 싸늘한 그 알 시멘트 바닥에 내 몸은 가을날 작대기에 털리는 마른 들깨 다발처럼 이리저리 굴려지며 무자비한 곡괭이 소나기를 맞고 있었다. 뼈가 아스러지고 턱 조각이 덜렁대며 군화발에 박이 터졌다. 바닥에 흘러 떨어진 선홍색 피는 불가사리 같은 모습으로 여기 저기 뚝! 뚝! 젖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 번져갔다. 곡괭이 매를 피해 북북 기며 한 뼘 침상 밑을 찾는 내 몸뚱이 위에 광란의 곡괭이 매타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없었고 죽어가는 짐승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내 몸뚱이만 있었다. 나는 달!달!달! 돌아가는 탈곡기 위에 얹혀진 체중 68 킬로그램의 살점 덩어리였다. 생각하는 능력은 커녕 생각한다는 기능조차도 깡그리 박탈된 상태였다. 지금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고 있었다. 모진 매로 몸이 불덩이 같았다. 죽어가는 주인의 육체를 살리려고 내 몸속의 피가 매 맞은 주위로 몰려들어 그곳은 다른 곳과 심하게 다른 색깔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기억이 이어져 가끔씩 악몽을 꾼다. 이 악몽이 언제쯤 잊혀질지 기약이 없다. 3월 초, 아직 봄은 오지 않아 싸늘한 밤공기가 내무반의 허름한 창문을 통해 스멀스멀 밀고 들어오던 그날 밤 광란의 그 곡괭이 춤, 내가 죽기 전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군 입대 첫 날의 지옥 같았던 기억. 나는 그 발원지가 쪽발이 일본의 잔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 당한 침란 동안 그들이 우리에게 심고 간 유전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보고 당한 그대로 했을 뿐이다.
오늘 소위, 군대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 귀향을 보았다. 보는 내내 나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져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원래 쪽발이 왜놈들의 행태가 그러하니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나의 눈물은 영화가 끝나고 집에 와서야 흐르기 시작했다. 힘을 못 가졌던 내 나라가 불쌍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런 불쌍한 나라에서 태어난 민초들이 겪어야했던 무력증에 눈물이 났다. 내가 당한 곡괭이 춤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그 날을 겪은 소녀들에게, 그 당사자 할머니들 딱 46분이 아직 살아계심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저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또 흘렀다.
춘포 박복진 (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
나의 영화평:
아쉬움이 많았다. 이 영화는 적어도 아카데미상 수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야만 했다. 저 예산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러면 만들지 말든지, 예산이 확보될 때 까지 기다렸어야했다. 트럭 한 대로 끌려가는 소녀들을 찍은 장면들은 너무 초라했다. 기차 화물칸 하나로 다 때운 장면들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끌려간 소녀들의 위안부 현장 장면은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극 사실주의로 가야만했다. 탈출을 위해 산속을 헤매는 소녀 네 명의 분장과 연기는 사실과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 우스꽝스러웠다. 장면이 펼쳐지면서 이야기가 나와야되는데, 이야기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 장면을 퍼즐로 갖다놓은 것 같아 정말로 아쉬웠다. 감독에게 영화 레버넌트를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지 한 가지만이라도, 분장에 있어 얼마마한 진지함이 필요한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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