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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제주도의 힘 (4, 최종회) 등록일 2016.10.11 05:16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47




제주도의 힘 (4, 최종회)

 

   밥집 아줌마가 찬거리 몇 가지를 죽은 말의 이빨 같은 색의 알루미늄 쟁반에 담고 있다. 손님은 나 혼자다. 주인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다. 바다는 그렇게 사람에게서 말을 닫고 눈만 열게 하나보다. 빠꼼하게 싸맨 바람막이 후드와 그 위에 걸친 우의, 비에 흠뻑 젖은 장갑 등을 벗었다. 제주국제 울트라 마라톤 참가자의 이름과 번호가 인쇄된 사각 헝겁이 찝힌 배낭도 벗어 함께 식탁위에 내려놓고, 식당입구 현관문을 통해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정말 많이 지쳤다. 어제 새벽 4시 기상, 6시 탑동광장 출발 이후 거의 30시간이 지나고 있다. 지금 내 신분은, 항공기 이착륙 금지 직전의 강풍과 함께 어제 새벽에 시작된, 제주 국제 울트라 마라톤 200km, 제한시간 36시간, 울트라 마라톤 대회 참가주자 160명 중 하나다.

 

   대회 출발 이후 작심한 듯 주자들을 괴롭힌 제주 특유의 3월 말 날씨는 그 심술이 극에 달했다. 앞뒤 분간 못할 폭우와 거리의 버려진 냉장고를 구르게 만드는 강풍과 어느 순간 비가 눈으로 변해서 달려드는 눈 싸래기들, 안경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와 잔자갈들. 비와 눈으로 밤새 젖고 언 몸은 옷을 움켜도, 움켜도 추웠다. 그 악천후 속을 뚫고 꼴깍 하루를 넘기고 지금 몇 시간 째 달려왔다. 처음 도전하는 초장거리 200km 울트라 마라톤대회는 100km 대회와 요구되는 인내심의 질과 양이 달랐다. 거기에 제주 특유의 강풍, 강우, 강설 등이 만들어내는 모든 악천후가 나를 포함 모든 주자들을 괴롭혔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친 전봇대위 전선이 내는 바람소리는 덫에 걸려 숨이 끊어지는 목쉰 귀신의 비명소리와도 같았다. 수면부족 귀신은 눈썹 끝에 달려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포기 유혹의 두 갈래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 때 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며 고개를 위로 아래로 흔들어댔다. 내 앞, 뒤 주자들은 이미 거의 포기한 듯, 주로에 나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허름한 밥집이 보여 기다시피 들어왔다. 당장 급하기로는 추위 말고 허기가 또 있었다. 창을 통해 보이는 바닷가의 파도가 또 한 번 철퍽하고 방파제를 때리며 부서진 파도가 식당 앞 도로까지 밀려왔다. 더 이상 못 갈 것 같았다. 너무 지쳐서 이제 포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 지금은 완전히 빛이 바래진 30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바로 이 근처 일텐데.. 이 집인가?

 

   그 때 나는 죽으려고 제주에 간 친구를 찾아 이곳 제주를 사흘째 싸돌아다니다가 여기 이 마을에 들렸었다. 위아래가 거의 똑같은 굵기의 뭉뚱한 쇠 젓가락으로 가져온 식탁 위 찬을 끄적거리던 내가 주방 쪽 계산대 위의 검정 전화기를 발견하고 주인 아줌마에게 돈을 드릴테니 서울로 전화 한 통 하자고 했었다. 서울의 동생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형 친구가 어제 전화 했어! 어디냐고 물으니 지금 마포라고 했어!

 

   아, 그랬었다! 제주도는 그렇게, 막힌 벽은 오직 더 강한 삶, 더 강한 의지로써만 뚫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30년 전 그 날 밤, 친구는 지금껏 살면서 보낸 그 어떤 밤보다 더 긴 밤을 뜬눈으로 보냈을 것이다. 제주도의 함덕 근처 어느 작은 어촌 민박집 쪽창문을 통해 아침 해가 기웃거릴 때, 친구는 결연히 일어섰을 것이다. 그리고 운명과 손잡고 나란히 끝까지 나아가기로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마지막 소지품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팔고, 입고 있던 양복을 저당 잡혀 목포로 가는 연락선 3등 객실 비닐 장판 한 귀퉁이를 사서 뭍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죽으려고 내려간 20대 한 청춘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건져내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겨주었던 제주도.

 

   그 제주도가 이번에는 나에게 말한다. 포기라니? 더 가야지. 이제 4 5 시간만 더 가면 되잖아. 피곤하고, 발의 물집이 문드러져 쓰라리고, 잠 때문에 졸리고 정신이 혼미하고, 춥고 떨리지만 포기라니? 지금이 출발이라고 생각해봐! 죽을 것 같지만 더 해봐. 어두운 구름 그 위에는 찬란한 금빛 해를 향한 아름다운 구름 융단이 있어. 그곳을 밟아봐. 지금부터는 완주선 아치만 생각하며 앞으로 나가봐. 죽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아. 지금 오늘이 네 생애 최고의 날이야. 그렇게 만들어봐..

 

   어쩌면 30년 전의 내 친구가 받았던 똑같은 제주의 속삭임을, 나도 받고 있었다. 그 속삭임은 낮았으나 매우 굵었다. 잠시 후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배낭을 걸치고 남은 거리를 향해 다시 뛰었다. 제주 울트라 마라톤 200km 대회 완주선 아치가 보이자 잠시 멈췄다. 나는 어젯밤 내내 강풍, , 비의 추위와 졸음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제주에게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바쳤다. 대회 사상 최악의 날씨에도 포기하지 않고 명예롭게 완주한 그 해 완주자들에게 나의 울트라 마라톤 동료들은 이라는 극존칭을 붙혀주었다. 나는 그 ” , Sir를 내 친구를 살려준, 나의 200km 도전 완주를 만들어준, 제주도에게 양보하였다. 제주도의 힘에게..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덧글:

  필자는 도전자 160명 중 포기자 59명을 제외한 완주 101명 중 28번째로 완주선을 밟았습니다.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이 주최하는 제152016년도 제주국제울트라마라톤 200km 대회는 423일 개최됩니다. 금일 현재 금년도 참가 신청자는 119명입니다. 필자는 지금 현재, 세계 울트라 마라토너 연맹, 아시아/오세아니아 대표로 봉직하며 울트라 마라톤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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