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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삼각뿔자 등록일 2018.05.30 16:02
글쓴이 박복진 조회 1138






삼각뿔자                                                              박복진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손바닥만큼이나 컸던 정삼각형 뿔자는 자기 살 안에 여러 모양의 도형을 가지고 있었다. 큰 원, 작은 원, 더 작은 원. 큰 삼각, 작은 삼각. 큰 사각, 작은 사각, 마름모. 나는 처음으로 접했던 이 물건을 가지고 한동안 잘 놀았다. 누런 16절지 종이 위에 이 삼각 뿔자를 얹혀놓고 뿔자 안에 음각으로 파진 이 도형을 따라 연필심을 굴리면 내 그림은 삼각도 되고, 사각도 되고 마름모도 되었다. 종이를 아껴서 써야하는 시절이라 큰 원안에 작은 원을 또 그려도 보고, 이미 그린 도형에 다른 도형도 겹쳐서 그렸다.

 

귀촌해서 독립가옥에 사는 나와 아내의 화단 가꾸기는 바로 이 삼각뿔 잣대 놀음과 같다. 우리는 마당 언저리 꽃밭의 꽃들을 대문간 입구로, 데크를 돌아가는 구석으로, 동쪽의 통나무 집 앞으로, 또 어떤 것은 제석님전의 복을 잔뜩 받아 햇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며 모았다가 헤쳤다가 꽃이 가지고 있는 색깔과 모양으로 도형놀이를 한다. 어느 놈은 자리를 잡고 몇 년을 이사 없이 그 자리에서 살지만, 또 어느 놈은 일주일을 못 넘기고 우악스런 삽질 한 번에 살던 곳을 떠나 새 자리로 옮겨진다. 옮겨져 새로 자리한 그 곳이 더 좋아 보여 재수가 있었다고 희번덕거리는 나무도 있지만, 새로 식재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우울해 보이는 꽃나무도 있다. 그 자리는 아침 잠깐 밖에는 해를 못 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지가 가진 모양과 색이 그래서 우리가 그곳으로 옮겨 꽃밭의 새로운 도형을 만들고자 했으니 주인인 우리 내외의 작심에 그저 순응만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굴 탓하랴? 지 운명이 그러하거늘.

 

날씨가 더없이 좋은 5월의 중순 주말. 바람은 불며 지나가는 게 아니고 아예 내 볼에 찰싹 달라붙어 오늘 하루를 보내려고 작정했나보다. 동동구리무 문지르는 아낙의 손놀림처럼 내 볼에 부드러운 원을 자꾸 그려준다. 우리 내외는 점심 밥숟갈을 놓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삽과 호미를 들고 한바탕 삼각 뿔자 놀이를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린 이렇게 도자기 커피 잔에 커피를 담아들고 마당 한켠의 하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새로 만든 꽃밭의 도형이 커피 잔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온다.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은 삼각 뿔자의 어느 도형이었을까? 누가 나보고 무얼 그리려하며 살아왔는지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무엇이 될까? 남들은 종이가 작아 밖으로 삐져나가도록 큰 원을 그리는데. 또 어느 누구는 종이 한 장이 모자라 다발로 갖다 쌓아놓고 자기 도형을 그리며 사는데..

 

돌아보면 내 삶의 도형은 이 도자기 잔의 작은 손가락 고리 타원보다도 더 작았나보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미처 생각도 하기 전에 지나가버린 지난 젊은 세월이다. 망칠에 이르고서야 느끼는 아쉬움이다. 내게 주어진 삼각 뿔자가 작았다고, 내가 그리고자 했던 그 안의 원이 작았다고 그리고 내 꿈을 펼칠 종이가 모자랐다 뒤돌아봐지지만, 어쩌랴? 저기 저 화단의 꽃처럼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그곳에서 향을 내며 그 자리에서 내 존재로 이 세상의 도형을 만들며 살아왔으면 되지.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밖에 펼쳐진 작은 뿔잣대 속 도형과도 같은 이런저런 전원 속 정경을 보며, 호미를 들고 꽃밭의 꽃들과 대화하며, 이렇게 도자기 막잔에 커피 가득히 담아 마시고 아내랑 하얀 벤치에 앉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면 되지.

 

맹칼없이 도자기 잔의 고리 속에 끼인 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냥 푸른 5월 하늘을 다시 한 번 더 올려다볼 때, 냇가에서 왜가리 한 마리가 목을 불룩하게 만들며 내 안경에 금을 긋고 지나간다. 세모도 네모도 다 부질없네. 나처럼 이렇게 밋밋한 직선으로 살아도 그것 또한 괜찮은 삶이라네! 하면서..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201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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