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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산책 등록일 2017.12.15 05:13
글쓴이 박복진 조회 1573

 



산책                                                    박복진

 

   논과 논 사이의 경운기 길로 포장된 시멘트 길이다. 그 위에 굴러 떨어진 낙엽이 조금 들썩하고 움직였다.

바로 앞 산등성이를 넘어온 늦가을 바람이 심술을 부리며 신발 앞부리로 걷어찼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 다섯 살 손녀의 한낮 산책은 즐겁다. 주말에 놀러온 손녀는 분홍색 원단위에 하얀 토끼털 같은 후드 점퍼로

머리를 감싸고, 빨간 목도리로 목을 두 번 돌려 앞에 고리를 맸다. 나에게 내어준 손녀의 고사리 손은 내 손바닥의

움푹 파인 아귀에 다 들어오고도 널널하다. 우린 둘이서 손을 잡고 집 앞 농로를 따라 걸어간다. 산책길 농로의

좌로 우로 단풍진 가을 산이 팔짱을 끼고 우리를 내려다본다. 길 따라서 옆의 작은 시냇물이 우리들 그림자를

적시지 않으려 긴 몸뚱이를 요리조리 틀며 구불구불 비켜서 흘러간다. 손녀가 나에게 내준 손을 앞으로 휘익

내밀더니 나를 올려다보고 입을 딸싹였다. ‘ 할아버지, 여기는 들도 있고 집도 있고 들마을이네? ’.

우리 유치원에는 산마을반, 들마을반, 강마을반이 있는데. 나는 들마을반이야, 할아버지..’

 

   우리 손녀의 입에서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의 판단을 지휘하는 신경계통은 무너진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럽고 달콤하며 모든 이성적 판단을 단박에 후순위로 끌어내 녹여버리는, 손녀가

나를 부르는 할아버지라는 단어. 그 말 한마디면 내가 기함 일보 직전까지 간다는 사실을 손녀는 알 리가 없다.

 

   아가야! 네가 우주의 어느 별에서 이 지구로 오던 오 년 전 그 날, 나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산마을을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서 내 머릿속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생각들, 그것은 마치 내가 달리면서 맞는 모든 바람들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빨려 들어와, 바람 하나, 하나가 자음과 모음의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나에게 읽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활자로 고착된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고 표현할 수 없는 더 고차원적인 무형의

그 무엇이었다. 신의 존재를 말하는 유신과 무신의 허잡한 주제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조그만 실바람 속에도

조물주의 전언이 담긴 것 같아 붙잡고 묻고 싶었던 것, 나는 그토록 숭고하고 진지하며 무엇인지도 모를 간절함 속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너의 탄생을 기다리던 조바심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들이 얼마나 모아졌을까?

드디어 산통이 끝나고 너의 탄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아가야, 그 때부터 너는 내 가슴에 뿌리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단다, 아가야. 그때 저절로 내 무릎이 꿇리고 두 손이 모아져 하늘을 향해 감사의 경배를

마친 나에게 염치없이 스멀스멀 밀려온 또 다른 간절함이 있었으니, 우리 아가가 어서 빨리 자라 할아버지인

나와 손잡고 걸으며 대화를 하게 되는 날이 어서 왔으면 했는데 이게 벌써 우리에게 다가왔구나. 이제 이렇게

네가 너를 말하고 내가 나를 말하며 우리가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세상의 천지 만물을 다루시는

저 높은 하늘에게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 할아버지!’ 저기 저 산 가운데에는 왜 나무가 노랗고 거기만 그래?’. ‘ 아가야 거기는..’ 라고 설명을 하려다가

나는 손녀의 눈높이 맞는 이야기로 바꿨다. 낙엽송이라든가, 침엽수라든가 라는 잘난 교과서적인 설명을 얼른

거두고 걸음을 멈추어 무릎을 꺾어 우리 손녀를 보며 말을 했다. ‘ 그거는 아가야, 하늘에서 천사들이 물감을

가지고 색칠놀이를 했어요. 예쁜 공주의 드레스에 색칠을 하는데 물감통이 그만 주르르 흘러내려서 저기 저 산

가운데로 흘러 떨어진 거야. 여러색이 마구 흘러내렸는데 저기에는 노란색이 많이 떨어졌나봐’.

 

  빈약한 상상력으로 내 낯이 순간 붉어졌지만, 생각이 거기에 머물 시간이 없다. 5살 손녀는 망칠의 할아버지인

나에게 다음 질문을 또 던져놓고 나는 벌써 바닥나 후줄근한 상상력을 닥닥 긁어 서둘러 대답을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마을 흙길을 걸어간다. 이 때 골짜기 건너온 살짝 바람이 울타리용 화살나무의 나뭇잎에 작은 도리질을

청하고 간다. 한낮의 태양은 그 잎에 더 붉은 색의 입술연지를 덧칠해주며 달랜다. 나는 잡은 손녀의 고사리

손을 풀었다가 다시 크게 감아쥔다. 그 때 손녀는 나를 울려다보며 말한다. ‘할아버지, 나 업어줘요.’

 

  등에 업힌 손녀가 스스로 리듬을 만들도록 좌로 조금 뒤뚱, 우로 조금 뒤뚱 소나티네 악장을 만들며 나는 걷는다.

부귀가 무어고 공명이 무어며 살아온 어제가 무슨 대순가? 그저 이렇게 오늘 내 귀여운 손녀의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들으며 고사리 손잡고 산마을 산책을 할 수 있으면 되지. 나는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만들고,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대답을 입안에서 궁시렁 거려본다.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만든 내 손안장에 안긴 손녀를 가볍게

풀썩! 위로 고쳐 업었다. 저기 우리 집 하얀 대문이 보인다. 다 와 간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 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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