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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K 시인에게 보내는 핀란드 울트라 완주 편지 (6) 등록일 2017.09.11 11:37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04

K 시인에게 보내는 완주 편지 (6)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K 시인아!

 

오늘은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 225km 일정 중 제일 긴 거리인 50km를 뛰었지만, 낮이 긴 이곳 특성상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았다

50km 거리의 마지막 완주선은 이미 고지된 그대로 호수였다. 우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 갈 그런 폭의 숲속 흙길을 다 뛰고 나서 

옆길로 꼬부라져 20여 미터 들어가자 커다란 호수가 확! 시야에 펼쳐졌다. 통나무 별장 주인이 해놓은 것 같은 목재 계단이 호수 

물속까지 연결되어 우리는 발에 호숫가의 흙을 묻힐 염려가 없이 바로 물속으로 첨벙하고 들어갔다. 엄청 상쾌하고 시원했다

장거리 마라톤에서 완주선이 호수라니.. 옷을 찾고 들고 차를 타거나 걸어서 목욕탕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첨벙이라니..뱀이나 거머리 같은 물것의 염려가 조금 있었지만 청정 핀란드라고 하니 물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첨벙하고 입수했다. 물속에 머리를 박았다가 수면 위로 솟구쳐서 눈높이 저 멀리 호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봤다

아주 큰 호수였다.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이 주는 별미였고, 이것 때문에도 내년 주자들이 더 뛰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 별장은 이번 대회를 나랑 같이 공동 주관한 란타씨 개인 소유이며, 차후 핀란드에서 여름을 보낼 계획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별장을 무료로 빌려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다.

 

그 별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별장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그 흔한 현대적 전기, 전열 기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즉 들어와서 바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된 게 하나도 없었다. 들어오면 벌레 시체들을 치워야하고, 나무를 토막

 내서 불을 지펴야하고, 가지고 온 식재료를 씻고 다듬고 끓이는 오랜 노력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핀란드인들이 보내는

 휴가의 방식이 이렇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가 그런 곳이었다. 휴가라고해서 시끌벅적 유명 피서지로

 가 바가지와 인파와 주차대란에 익숙한 우리네와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를 보내는 이곳 휴가 문화이다. 책 몇 권과 

애견과 그림엽서 몇 장과 먹을 것 약간만 들고 숲속 안 호숫가 별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름 정도를 지내는 사람들

해변 의자를 길게 펼쳐 비스듬히 누워서 숲 사이로 비춰드는 한 뼘 햇볕에 고마워하는 사람들. 호숫가 아침 물안개가 

예뻐 카누를 꺼내 혼자서 호수거울에 긴 꼬리를 만들고 지나가다 숲에 숨어 자리한 옆집의 주인에게 한날 노를 머리 위로 

들어 크게 아침 인사를 하는 사람들..

 

호수에서 나와 환복을 위해 커다란 목욕 수건을 몸에 걸치고 서서 잠깐 동안 생각을 해보았다. 휴가로 이곳 통나무 별장에 

나 혼자 왔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책을 읽고 의자에 누워 멍 때리기를 하고 엽서를 쓰고 커피를 마시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한뼘 햇살에 실눈을 보내기도하고, 그 다음, 그 다음, 며칠 아니 몇 시간을 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놓고 얼마나 버틸까? 아니 고국에서 그런 생활을 그리며 출발이나 가능할까? 아내랑 같이 온다고 해도 아내는 

또 아내대로 근처의 도시에나 나가보자고 몇 시간이나 참았다가 말할까? 자작나무 부스러기 모아 부싯돌로 불을 지핀다고 

무릎을 꿇고 꼴값을 떨고 있으면 고만하고 어서 라이타로 불 피우라고 왼손 접어 허리에 대고 오른 손으로 지휘봉 삼아 금방

 커지는 목소리를 듣게 되지나 않을까?

 

모두가 왁자지껄 유쾌한 웃음을 남기고 호수를 떠날 때 호수 위에서 우리를 촬영하던 드론은 우리보다 한참을 더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숲과 호수. 거기에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비경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촬영된 이것을 나중에 

대회 폐막식 비디오에서 보았고 환호했다. 핀란드에서의 호수는 동양화의 화선지처럼 기본이었고 바탕이었고 기초 

화장품이었다. 다시 말해 핀란드에서의 호수는 땅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호수가 있고 그 사이에 땅이 있었다. 그들의 

모든 삶은 옥수수를 삶는 가마솥 속의 물처럼 없어서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현지 대회 조직위는 

이곳을 50km의 완주선으로 삼아 달리게 했나보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울트라 마라톤의 호수 완주선 이었지만

이것은 오늘 저녁에 갖게 될 또 다른 감동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맛보기에 넘어간 우리는 곧 있을 본보기의 감동을 

모르는 채 이동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43명 전원 승차 완료 신호가 있자, 멋진 색안경을 쓴 운전수가 버스 앞문을 닫는 

단추를 눌렀다. 오늘의 감동이 새어나갈까 봐 잘 닫아주었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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