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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K 시인에게 보내는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 완주 편지(7) 등록일 2017.09.14 05:34
글쓴이 박복진 조회 1589



K 시인에게 보내는 핀란드 울트라 완주 편지 (7)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박복진

K 시인아!

지난 수 십 해 동안 나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경우로 외국을 나가면 그곳 현지인들과의 교우를 첫째로 치며

 그 순간을 즐긴다. 해서, 작년 여름,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 225km 대회를 기획하며 현지답사에 갔다가

그곳 현지 행사의 진행을 맡아주실 분, Savolahti 사볼라흐티씨 댁에 들려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때

나는 그 시간을 엄청 즐겼고 일정 중 최고의 추억으로 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분께 부탁을 드렸다.

2017년 우리 정식 대회 기간 중에 울트라 마라톤 참가자들이 당신의 댁에 들려서 차 한 잔 하게 해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드렸다. 그 댁에서 내가 받은 생생한 감동을 나의 울트라 동료 참가자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었다. 그곳 핀란드에서는 그저 좀 큰 보통농가 정도로 치는 그 집은, 우리 기준으로 치면 대단한 저택이

었다. 

거실의 벽에 걸린 수많은 사냥 도구들, 칼, 총, 박제된 동물의 두상들, 대대로 물려왔음이 분명한 식기,

냄비, 주전자, 부짓갱이, 다기들. 벽과 천장을 받치는 고색창연한 서까래 고목들이 품고 있는 오랜 세월의

장중함. 나는 압도되었다. 그것들은 비싸거나 귀한 것들이 아니었다. 집을 지을 당시 주변에 흔한

것들이었으나 세월이 내려주는 금가루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덧칠해왔을 뿐이었다. 그걸 바꾸거나

상하게 하지 않고 지키려 부단히 노력해왔을 뿐이었다. 거기에 맞는 주인 나름의 장식, 주인이 살아온

티만 조심스레 보태서 간직해 왔을 뿐이었다. 색이 바란 선조들의 흑백 사진들, 자녀들이 어렸을 때

 내리받이 바지 입고 햇살에 가는 눈 뜨고 현관 계단에서 찍은 사진들. 무엇보다도 도로에서 그 저택으로

들어가는 긴 입구의 양쪽 길가에 오랜 세월 도열해 서있는 키 큰 나무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보물이었고그 분의 자부심이었고 그 분의 인격이었다. 그냥 흘러간 세월들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든

그 분과 그 분의 조상들이 몹시 훌륭해 보였다. 

그런 것이었다. 내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예를 들면, 돈을 벌 때마다 새로 장만하는 더 고가의 식탁이

아니었다. 세월을 견딜 매우 두꺼운 나무로 투박하게 도끼로 다듬은 목재 식탁. 아이가 다섯 살 때

실수로 양초를 넘어뜨려 조금 타고 그을렸다고 기억하는 작은 흠집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무거워 첫 번째

 그곳에 자리 잡고 단 한 번도 이동을 못하고 지금까지 놓여있다는 그 식탁. 할아버지가 식사 전에 감사

기도 시작을 알리려 숟가락으로 탁! 탁! 치던 모서리라 그 자리가 조금 많이 파인 식탁. 그 식탁에 오늘도

지금의 내가 내 자식들과 식사를 위해 옹기종기 둘러앉은 모습,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다. 

나의 생각은 맞았다. 2017년 제1회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 225km 참가 선수들이 오늘 예정된 프로그램으로

Savolahti 사볼라흐티씨 저택을 방문했다. 우리들의 리무진 버스가 저택으로 들어가는 긴 입구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들어가자 울트라 동료들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일반적인 여행사나 상업적 목적으로

치뤄지는 대회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귀한 시간이고 기회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저택보다는 그런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사볼라흐티씨 부부 모습이었다. 모두들 주변 환경과 저택에 반해 두 눈을 바삐

움직이고 왁자지껄 큰 소란을 만들고 있을 때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 두 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 일행을 맞는 거룩하기까지 한 두 분의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우선 사볼라흐티 부인은 정장을 하고 있었다. 핀란드식 전통 복장이라고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화려하고

기품이 있는, 그러면서 축제 분위기를 자연 발산시키는 그런 복장이었다. 매우 하얀 순백색 머리 수건이

간호사들 그것처럼 머리 뒷부분에 살짝 얹혀져 금발의 머리칼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같은 순백의

 긴 소매 블라우스, 같은 원단 같은 하얀색으로 치마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 하얀 치마보다 약간 더 긴

이루고 있었다. 하얀 순백색이 우리를 환영하는 총 지배자로 군림하는 의상 색깔이었다. 여기에 핀란드를

 여행하며 집이나 건물의 외벽 색깔로 수없이 보아왔던 것과 똑같은 붉은색이 검은색과 나란히 조화를

이룬 세로줄 무늬 속치마는 뭔가는 다른 특별함, 한껏 벌려놓은 잔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 입은 진한 검정 더거리는 어깨끈이 얇고 가슴만 살짝 덮었다. 이렇게 정성을 들여 차려

입은 전통 복장의 아내를 오른 쪽으로 하고 나란히 선 두 분은 현관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진 잔디위에

두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고 서있었다. 마치 발아래에 분필로 자리 표시를 하고서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 내내 한 자리에서 입장하는 42명 전원의 손을 잡으며 다정다감한 미소로 눈을 맞추어

주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Kiidos! Kiidos!!

나는 생각했다. 어느 누가 내 집을 방문할 때 이처럼 기품이 있는 환영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그 무슨 전통으로 나를 가꾸고 치장해서 그 내방객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으로,

 두 문, 세 문 최신형 냉장고가 아닌, 속 깊고 두터운 그 무슨 전통으로, 내가 지금 이 분들로부터 받은

감동을 나도 그 분들에게 줄 수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은 이 물음에 나는 잠시 부끄러움도 느꼈다.

그러나 나의 진지함과는 상관없이 주위는 바쁘게 돌아갔다. 나도 일행을 따라 울트라 동료들의 감탄이

이어지는 집안 구석구석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대회 일정 중에 뜀꾼들이 핀란드 현지인들과의 교감을 이룰 시간과 장소를 꼭 마련하자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란타씨를 바라보았고 란타씨도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은 같이 웃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울트라 마라톤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의 확인이었다.

핀란드 현지 사볼라흐티씨 내외의 삶이 녹아있는 저택과 핀란드 현지인 그들의 손님 접대 모습이

우리들에게 준 감동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하루해가 다 지기 전 그 날, 또 다른 감동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