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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마라톤 인연 이어가기 등록일 2019.11.15 07:42
글쓴이 박복진 조회 846





마라톤 인연 이어가기

 

거리에서 낯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다거나 또 그런 상황이 임박하면 좌고우면 없이 그렇게 하겠지만, 날씨 좋은 가을날 매우 한가한 오후, 북적거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그것도 키가 190cm에 육박하고 체중이 100kg이 넘을 것 같은 장대한 외국 젊은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는 상점에서 도자기 찻잔 몇 개를 고르면서 매점 주인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듯했습니다. 두 개 사니 값을 깎아달라는 다소 어렵게 뱉은 청인데 안 받아들여지니 좀 민망해진 것 같았습니다. 옆에 있던 내가 도움을 주기로 했는데, 이렇게 쉽게 마음을 먹은 것은 그가 입고 있었던 2015년도 보스톤 마라톤 기념 점퍼 때문이었습니다.

 

보스톤 마라톤을 뛰셨군요! 이 말 한마디로 우리 둘 사이의 벽은 금방 무너졌습니다. 나도 보스톤 마라톤의 영웅 이봉주 선수와 2002년에 같이 뛰었다는 이야기, 보스톤 마라톤 참가 신청이 잘 안되었으나 홍콩만에서 뛰다가 우연히 만난 어느 미국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현지 접수하고 뛰었다는 이야기, 이듬해 아틀랜타 여행시 그분과 재회해서 식사를 같이했다는 우연이 필연이 된 이야기. 지금은 마라톤을 넘어 울트라 마라톤으로 몽골과 핀란드에서 매년 225km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 북적대는 주말 인사동 대로에서 우리 둘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가만, 가만.. 이 친구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어 줄까? 내 조국 대한민국이 얼마나 문화 예술적으로 세련되었는지 보여줄까? 겉모습 인사동보다 진짜 속살을 보여줄까?

 

그 친구에게 지금 시간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한국 방문으로 인사동에 처음 왔으니 구경 말고는 다른 바쁜 일이 없다고 대답해서 나는 그 젊은이에게 나의 다음 약속 장소인 대학로 소극장 공간 마루채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뉴욕 거리 한가운데에서 어느 누가 나에게 그렇게 접근했다면 나는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순한 내용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서겠지요. 그러나 그 젊은이는 아무런 의심이 없이, 그리고 이게 웬 횡재냐? 라는 듯 선뜻 나와 동행해 주었습니다. 마라톤을 같이 하고 있다는 끈이 그를 단박에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에서의 인상 깊었던 자원봉사자 부부를 초청한 내 자리에, 인사동 찻잔 파는 상점에서 만난 보스니아 출신 미국인 마라토너가 끼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전통 풍물공연 대학로 지하 소극장, 최대 수용인원 20석 공간 마루채에서 이 젊은이가 느낀 우리 전통 가락의 감동은 그야말로 대박입니다. 공연 시작과 함께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징, , 장구와 꽹과리의 현란한 풍물 파동에 넋이 얼추 반은 나갔습니다. 낯선 이국땅,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만난 마라토너에게 초대되어 처음으로 접해보는, 매우 이색적인 대한민국 전통 풍물.. 가뜩이나 커다란 이 서양 코쟁이분의 두 눈은 깜박거림도 잊은 채 풍물가락에 풍덩 빠졌습니다. 옆에 앉은 나를 향해 연신 좌, 우 두 개 엄지척을 펴 보입니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렇게 현란한 기교의 가락이, 어떻게 이런 흥이, 어떻게 타악기 단 네 개로 내 저렇게 펼쳐지는가? 낯선 나라에 처음 와서, 생각지도 못한 생면부지와의 마라톤 인연으로, 분에 넘치는 무상 초대를 받아 나는 오늘 이 행운을 만끽하는가?

 

나는 그의 기분 좋은 몰입을 바라보았습니다. 마라톤이라는 같은 취미로 이어지는 내 인연의 끈을 꼬옥 붙잡고서 애정 가득 담긴 눈으로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나의 마라톤 인연. 앞으로 또 무엇이 어떻게 이어질런지요?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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