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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급수대의 핀란드 여인 등록일 2019.10.08 10:46
글쓴이 박복진 조회 328



급수대의 핀란드 여인

 

인도양과 대서양이 나눠지고 합쳐지는 남아공의 국토 남단 바닷가처럼, 나는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구획 분간이 없이 마구 섞여져서 자라고 있는 핀란드 숲을 달린다. 조금 전 지나온 오래된 고성에서의 멋들어진 식사와 현지인의 그 고성에 관한 옛 이야기는 나를 중세의 어느 여름날로 훌쩍 데려다주었다. 나는 철갑과 투구로 무장하고 말을 타는 19세기 핀란드 기사가 되어 숲속을 달리고 있다. 숲의 적막감 속에 오래 갇혀 켜켜히 눌려 쌓였던 공기는 내가 그 속을 뚫고 달릴 때 좌우로 갈리는 동작이 매우 굼떴다. 이렇게 움직여보는 게 얼마 만이지? 라고 자기네들끼리 물으며 키득거리는 것 같다.

 

간간이 내리는 빗방울이 조금 굵어지더니 쓰고 있는 모자 차양 위에 내려앉아 전깃줄의 까치처럼 꼬리를 아래로 길게 내린다. 이때쯤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마라톤 중간 지점 급수대가 간절히 생각날 때 바닥에 고구마 전분으로 표시된 화살표가 나타났다. 가는 방향으로 직진하지 말고 숲속길 현지인 주택 안으로 들어가라는 급수대 안내 방향 표시였다.

 

바닥의 화살표를 따라 긴가민가하며 뛰어들어갔다. 숲속 길을 뛰어오며 드문드문 봤던 평범한 핀란드 시골 숲속 주택이었다. 작은 마당안을 옆댕이로 따라 들어가니 넝쿨 식물을 위해 설치한 목재 터널도 있었다. 추운 핀란드 지역 특성 때문인지 현관을 통해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작고 낮았다. 거기에 한 부인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참가 선수들 숫자에 맞춰 집에서 만든 핀란드 가정식 먹거리 파이와 빵, 마실 것으로 핀란드 전통 음료 등이 차려진 곳, 중간 급수대였다. 탁자 옆에는 앞서 도착한 동료 마라토너들 너덧이 있었다. 그들은 먹거리를 들고 집 안팍을 돌며 전혀 예상을 못 했던 이 급수대의 출현과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시고 계시는 50대 후반 이 숙녀분에 대해 감사와 기분 좋은 호기심을 표했다.

 

그 댁 주인인 숙녀분은 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색이 밝게 섞인 목이 깊게 파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완전 초록의 건강한 핀란드 숲속에서 이런 식의 원색 옷이 좋은 대비를 이루었다. 부인의 어깨 위로는 햇빛가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목 언저리의 맨살이 많이 붉어 보였다. 금색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아주 연한 갈색 뿔테 안경은 매우 오래된 듯 광이 모두 사라졌다. 이것이 오히려 부인의 품위를 받혀 주었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햇빛가림을 하지 않은 듯, 잘 익은 자두와 같이 밝고 붉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영양섭취 불균형이 없었나 보다. 양 볼때기 볼살이 터져나갈 듯 탁구공처럼 원형에 가까웠다. 쓰고 있는 안경은 코 대신 그 볼따구니 위에 걸쳐도 흘러내릴 것 같지 않았다. 푸른색의 눈, 벽안의 이 숙녀분 눈동자가 안경알 속에서 한 방울 빗물과 함께 반짝 빛났다.

 

이런 깊은 숲속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민가가 급수대라니.. 이 숙녀분 그 어느 곳을 보아도 울트라 마라톤하고는 연관이 없어 보였다. 나는 그 숙녀분의 봉사에 대한, 내놓은 음식과 음료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나서 물었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에 무슨 인연으로 자원봉사를 하시고 계시는지요? 이 외딴 숲속 독립가옥에서요? 그러자 그 여인은 입으로는 이야기를 할 듯 말 듯, 손으로는 맹칼없이 탁자 위의 파이와 음료를 가지런히 다시 정리하는, 안 해도 되는 일을 얼마간 계속하더니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알록달록 원피스 치마의 무늬 전체가 동시에 나랑 똑같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마라톤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울트라가 뭔지도 알지 못해요. 며칠 전 마을 회관에 나갔다가 외국에서 사람들이 여기 와서 마라톤을 할 예정인데, 코스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간다는 것이었어요. 더 놀란 것은, 이 행사의 주최자가 내가 아는 40년 전의 학교 동창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집에서 파이랑, 빵이랑 만들어 요기할 것과 내가 집에서 베리로 담근 음료수를 몰래 내놓고 기다리기로 하였었어요. 이 행사 조직위원장 그 분과 나는 같은 마을에서 살았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서로 좋아했고 아마 내가 더 좋아했었나 봐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풋내나는 십 대 애들이 다 그렇듯 우리도 서로 좋아는 해도 표시는 못하고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겼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며 집의 큰 트렉터도 잘 몰았어요. 마을 무도회에서 보면 또래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아 대기 의자에 앉을 시간이 없었어요. 나는 수줍어 자꾸 구석 바깥쪽으로만 뱅뱅 돌았고요. 그러다가 모두 졸업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껏 살았는데 소문으로만 그는 그동안 해외에 나가서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 분을 본다니 우습게도 그동안 묻혀왔던 그 시절 잠시 잠깐의 연애감정이 솟아나네요. 그는 아직 여기를 모르고 아직 안 왔어요. 대회 진행으로 바쁜가 봐요. 40년이 지나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데 이따가 나를 보면 엄청 놀랄 것 같아요. 어쩌면 늙었다고 고개를 돌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기다려져요. 오늘 저녁 읍내 부둣가 레스토랑에서 폐막식을 하는데 거기에 봉사자들도 나오라고 초대했대요. 그런데 아직 갈지 말지 몰라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숲속 급수대 외딴 집 그 여인의 볼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가뜩이나 빨간 볼따구니가 점점 더 빨갛게 짙어졌다.

 

여기는 2019년도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가 진행되고 있는 라세포리

Raasepori 숲속 급수대, 40여 년 전 한 소녀의 풋내 풀풀나던 연애감정의 되감기 현장입니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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