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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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무제 등록일 2016.09.30 05:00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96



무제                            

 

 

   주부인 나는 매일 아침 새벽 거의 정해진 시각에 어느 남자를 봅니다. 내가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이제 1년이 다 돼갑니다. 맨 처음 그 때는 아파트 단지 작은 도로에 수북이 쌓여 있던 낙엽들도 다 쓸어 걷어내어지고, 그 위에 찬 북쪽 바람이 맛보기로 휘이잉! 하고 한바탕씩 쓸고 지나가던 초겨울 쯤 이었습니다. 어제,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입어야 할 남편 와이셔츠를 다려놓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던 생각이 나서, 이른 새벽에 겉옷을 걸치고 베란다 구석에 세워 놓았던 다림질 판을 가져오기 위해 거실 여닫이 창문을 열었을 때, 유리 창을 통해 단지 내 소 도로에 움직이는 시커먼 물체를 보았습니다. 그 움직이는 물체는 사람이었습니다.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 남자의 입김인지, 콧김인지 모를 하얀 김이 달리는 앞으로 날숨 되어 뿌옇게 흐트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어느 한 남자의 새벽 운동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 남자의 모습이 단지 내 도로 끝까지 다 가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다림질 판을 들고 거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그 남자의 존재를 잊어 버렸습니다. 아니 잊어버린다는 상황 자체도 잊어 버렸습니다. 새벽 창문 너머로 보였던 어느 한 남자의 아침 달리기하는 모습은, 어찌 보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들썩거리는 압력 밥솥 뚜껑의 꼭다리처럼 잠깐 시선을 끌었다가 곧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평범한 일상이었으니까요.

 

   처음 본 그 후로 두 어 달이 지났습니다. 월요일 아침, 또다시 베란다 창고로 가 다리미 판을 찾으려 졸린 눈을 부비다가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보았을 때, 나는 그 남자의 모습을 또 보았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운동 복장은 바뀌었으나, 분명 저 모습은 바로 두 달 전 그 남자의 그 모습이었습니다, 달리면서 내뿜는 날숨의 입김, 콧김은 두 달 전 보다 훨씬 더 진하고 선명해 졌습니다. 당연히 날씨 탓이겠지만 나는, 그의 진지한 운동 자세로 보아, 그 남자의 운동 강도가 더 세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두 어 달 전에 보았던 짧은 반바지 차림 밑의 적당히 그을린 근육뭉텅이의 두 다리는 긴 트레이닝 바지 속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방금 본 그 남자의 달리는 모습에서 긴 옷을 뚫고 두 어 달 전의 그 근육뭉치 다리통을 보았습니다. 변함없이 그 남자는 또 그렇게 아파트 단지 내 소 도로 끝으로 달려갔습니다. 바깥이 너무 어두워서 내 시선은 더 이상 그 남자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그 시각, 그 장소를 지나가는 아주 특이하고도 보기 드문 끈기의 소유자인 것 같았습니다. 마라토너, 그 남자는 마라토너이었나 봅니다. 그런 단어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마라토너. 동네에서 아파트 아줌마들 간에는 꽤 알려진 7단지 마라토너 남자라고 알려진 그 남자를 새벽에 제가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올 가을에 아파트 노상 주차장에서 같은 동 아주머니 차와 경미한 접촉 사고를 냈을 때, 즉시 차문을 열고나와 아주 정중히, “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차내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에 빠져 그만,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그 슈베르트 피아노 마라토너입니다. 느끼었던, 안 느끼었던 나의 마음에 동네 마라토너 그 남자의 존재는 조금씩, 조금씩 정으로 쪼아져 각인되어 가고 있었나봅니다. 새벽 그 시간, 창문을 열어 놓고 이제 지나가는 그 남자의 모습을 기다릴 때도 있었습니다. 단지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그 남자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들고 있는 다림이판을 한참동안 손가락 끝으로 토닥거리며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 망측해라!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이 아줌마가 지금 무얼 기대하고 있는 거지? 이름 모를 어느 중년 마라토너의 새벽 운동시간을 기다리다니? 그러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을 한 번 살짝 빼어 내다보며 창밖 그 남자 모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면 그 남자와 마주칠 수 있을까? 그래서 말 한 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을까? 운동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자주 하시나 봐요? 523동에 사세요? ..... 나는 더 이상 앉아서 옷고름 돌돌 말며 기다리는 수줍은 조선 아낙이 아니었습니다. 아끼던 빠알간 립스틱을 바르고 단지 내 도로 골목 굽은 곳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그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손에는 아들의 실전 수능 수학 문제집 분리수거 한 뭉치가 빨간 끄나풀로 묶여져 들려 있었습니다. , 그 남자가 저기 옵니다. 나는 이제 이 순간, 나와 관련되어진 이 세상 모든 운명을 내 치마폭에 다 담아서 지고 갈 요량으로, 앞 뒤 분간 없이 덥석 포옹하는 자세로 달려오던 그 남자 앞을 막고 섰습니다.

 

“ ...........!!!! ”

 

, 왜 그렇게 놀래 서 있어요? 뛰어 왔으면 어서 빨리 씻고 밥 먹고 출근 할 생각은

안하고!! 토스트 잼이 떨어져서 사러 나왔어요. 어서 먼저 들어가요. 나 사가지고 바로 들어 갈 테니까요. 당신 이 꼭두새벽에 뛰어오면서 꼭 무슨 좋은 일 생각하며 오는 것 같대요? , 좋은 일 있었어요? 양 볼때기가 빤지르르하네요?“

 

   요즈음 들어 쓸 데 없는 공상을 하고 달리던 내 앞에 터억 버티고 선 사람은, 털어놓으면 맞아 뒈지기 딱 맞는 쓸데 하나 없는 내 공상 속 주인공, 6단지 예쁜 아줌마가 아니었습니다. 평소 내가 그냥 보기만을 좋아하던 동네의 그 예쁘장한 아줌마, 가끔씩 내가 단지 내 소 도로를 뛰어 갈 때 내가 안보는 척 하며 623동 베란다 창문 쪽으로 흘깃흘깃 바라보던 그 예쁘장한 아줌마가 아니라, 나의 아침 식사를 위해 떨어진 딸기 잼을 사러 나온,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스런 바로 내 아내이었습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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