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토너와 뇌 세포 아내는 말합니다. 울트라 마라톤을 하면 뇌 세포가 망가져서 자꾸자꾸 멍청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차를 몰고 갈 때 한 번도 헷갈리는 법이 없이 들어가는 길목도 나가는 길목도 귀신같이 잘 찾아서 다니고, 운전하며 대충대충 손전화로 받은 번지수도 안 잊어버리고 용케 잘 찾아 다녔는데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랑 같이 외출해서 운전하고 갈 때면 운전석 옆에 앉은 아내로부터 곧잘 핀잔을 받게 됩니다. 웬 일이야? 옛날에는 안 그러던데? 라는 반 놀람, 반 조롱 표시의 잔소리는 예사요, 저저저저젓! 좌회전, 좌회전!! 거의 절망적인 탄식이 섞인 운전 방향 정정 지시받기가 다반사입니다. 기억력이라고 했지만 숫자로 가면 더 엉망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마라톤 때문에 뇌 세포가 망가져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가며 당연이 그렇게 되는 순리를 타서 그런지. 자꾸 그렇다, 그렇다 하니 자신감이 더 없어져서 어데 가서 누구한테 들은 전화번호는 바로 옆에 필기도구가 없다면 이 번호를 단 몇 분만이라 외우고 왼전하게 집까지 와서 작기장에 적어 놓기가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주전자 물 마시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물론, 지금같이 녹음기능이 있는 스마트 폰이 나오기 훨씬 이전 이야기입니다. 어느 토요일 장거리 길오달 나갔다가 더위에 반 뒈져서 돌아온 게 영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허리에 물병을 차고 동네 뒷산에 뛰러갔습니다. 한참을 뛰다보니 모모 마라톤 클럽 유니폼을 입은 뜀꾼들이 앞, 뒤로 콧김을 풍풍 풍기시며 오르막 내리막 거칠 것 없이 달려가십니다. 대단한 주력들이십니다. 어느 분은 오늘 급수 당번이신지, 커다란 수박을 들고 집합 장소인 듯 한 곳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대단한 동료애이십니다. 한 바탕 뜀질이 거의 끝나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집을 향해 내려 갈 요량인 참에 내 앞에서 힘들게 걸으시던 어느 남자분이 막 그 옆을 지나치던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자기는 아주 오래 전에 하프 마라톤을 2-3 번 해 봤는데 10km 만 넘으면 너무 힘이 들어 마라톤을 포기 했다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주로에서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다시 마라톤을 해보고 싶다하며 이것, 저것 마라톤에 관해 많이 물으셨습니다. 예비역 포대 사령관이라 하셨고 지금은 전역해서 소일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마라톤을 시작하게 나중에 꼭 연락을 좀 해 달라하시며 그 분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가 생겼지요. 산에서 뛰다 만났는데 휴대전화도 없고 필기도구도 없어서지요. 그래서 나는 내 번호를 가르쳐 드리고 그 분은 그 분 번호를 가르쳐 주었는데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집에 가서 서로 전화 해 주기로 했습니다. 11 단위 전화 번호 숫자를 기억하고 앞으로 3km 정도를 더 가서 전화를 한다? 마라톤으로 망가진 내 뇌세포가 과연 그걸 가능케 해 줄까? 내가 보기에 당연이 그 분도 그 숫자를 외우는 게 자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만일 둘 전부 다 외우기를 실패하면 언제 다시 만날 때를 기다려야하는 상황입니다.
둘 다 헤어지는 인사를 최대한 짧게 하고, 바로 돌아서면서 번호를 다시 재확인하고 입속에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번호를 잊지 않으려면 입속의 중얼거림을 멈추면 안 되는 순간입니다. 0173180418..017318041..0173180..... 숫자 하나가 땅바닥에라도 떨어질세라 나무 등걸이도 촐싹 넘지 않고 물동이 머리에 인 동네 처녀 대문 문지방 넘어가듯, 놀부 넘 흥부네 집에서 화초장 뺏어오며 화초장 이름 뇌이듯 조심, 조심. 그리고 또 조심. 01731804.. 그러나 마라톤이 못 뺏어가는 영역의 뇌세포가 내게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 맞고 가는 땡중처럼 중얼중얼 휴대전화 번호를 외우고 내려가던 나는 내리막길 옆 비탈에 구부러진 떡갈나무를 보았습니다. 넓대디한 나뭇잎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기록을 하기 시작하던 그 상황을 생각해 냈습니다. 필기도구가 없었던 그 당시 원시인들이 했었을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인심 후한 도봉산 밑 등산로 가게 할머니의 호박전만한, 비교적 성한 떡깔나무 잎 한 장 을 뜯어들고 이 쑤시게 길이만한 마른 나무줄기를 땅 바닥에서 주워 그 나뭇잎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의 손금을 따라 조심, 조심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첫 칸에 는 공란. 둘째 칸에 한 개. 그 다음 칸에 일곱 개. 그 다음 칸에 세 개... 이렇게 구멍을 뚫으며 탁월한 내 기지에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그 누구가 날 보고 마라톤을 해서 뇌 세포가 망가졌다고 할 것인가? 망가지기는 했어도, 적어도 죄다 망가졌다는 막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흐흐...라고 음흉한 웃음도 잃지 않으며.. 삐질삐질 땀 흘리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나의 하얀 면장갑 낀 손에 호박전만한, 구멍 뚫린 나뭇잎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서두를 게 없지요. 중얼중얼 숫자를 되뇌일 필요도 없지요. 느긋하게 욕실에서 소나기를 끝내고서 메모지와 볼펜 하나를 들고 거실의 대나무 돗자리에 벌렁 드러누어 천정을 향해 그 떡깔나무를 펴서 구멍 숫자를 세어 메모를 합니다. 절대 틀릴 리가 없지요. 발랑 누워서 나뭇잎을 펴서 천장을 보며 숫자를 읽어내는 이 모양을 본 아내가 베란다 빨래걸이에서 마른 빨래 한 보따리를 걷어들고 들어오다가 한 말씀 하십니다. ‘ 당신 뭐해요, 지금 ? ’ ‘ 응. 마라톤 하다가 망가져 떨어뜨린 뇌세포를 다시 주워왔어. ’ 나는 히죽 웃으며 대꾸합니다. 그러면서 다 적은 메모지를 들고 전화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다가가서 전화기 누름단추를 찾아 그 분께 전화를 하려합니다. 아내가 마른 빨래를 안고 아들 방으로 들어가며 아들에게 툭! 던지는 말이 귓가에 들립니다. ‘ 몇 개 안남은 세포도 옳게 안 박혔는갑다, 인자! 쯧 ! ’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춘포 박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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