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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마라토너 도둑 등록일 2016.10.11 05:29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38




마라토너 도둑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는 늘 해왔던 것처럼 나는 간밤에 아내에게 쓴 편지를 냉장고 문 위에 자석으로 눌러 붙여 놓고서는 새벽 뜀질을 나갔습니다. 퇴근하면서 장미 한 다발과 생일 축하 케익 하나를 사가지고 들어가서 저녁을 같이 먹게 되어있었지요. 

언젠가는 아내의 생일에 영국 출장 중이었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통신 체계가
발달되지 못했던 때라 아내에게 꽃을 전달 할 길이 없어 나는 영국에서 편지를 써서 방송국의 ‘이숙영의 FM 대행진‘ 코너에 팩스를 보냈었는데, 아내의 생일을 이역만리 외국에서 보내는 안타까운 사연이 당선이 되어서 그 날 아침, 방송국에서 꽃 한 다발과 샴페인 그리고 이따만한 케잌 한 통까지 배달이 와서 아내의 입을 함지박만 하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생일 축하 꽃은 빠질 수 없는 선물이지요.

어제 아들이 제 엄마 생일이라고 선물을 준비해서 자기 방 한쪽 구석에 감춰 놓는 걸 보았는데, 아침에 아들이 선물을 내어 놓을 때 나는 이따 저녁에 꽃 사줄 거라고 멀건이 있기가 민망할 것 같아, 저녁에 사줄 장미 한 다발을 지금 사주는 게 낫겠다싶어 동네 화원 비닐하우스가 많은 쪽으로 새벽 뜀질을 나갔으나 그 시간에 문을 연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고덕천 끝 지하철 공사 입구 담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넝쿨장미를 생각해 내고서는 다시 그 곳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곳 직원한테 사정을 이야기하고 몇 송이 얻어 가려고요. 그 앞 까지 뛰어가니 이곳이 국가 기간산업 시설 때문인지 정문에 키가 큰 공익요원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 수고 하십니다! 나는 맨 날 요 앞으로 뛰어 댕기는 마라톤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오늘이 우리 집 사람 생일인데, 내가 어제 저녁 모임이 있어 늦는 바람에 꽃을
못 사가지고 와서 그러는데 여기, 저기 담에 붙어 있는 장미 몇 개 꺾어 가면 어떻게
안 될까요? 이렇게 말하는 게 참 많이 쑥스럽네요, 이잉? ‘ 

그런데, 세상 참 야박하게도 그 공익 요원은 한 마디로 안됩니다!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확고부동하게 단칼에 무우 짤려 나가듯 내뱉는 그 요원의 거절에 어찌나 민망하든지요. 그래서 모자 차양을 약간 좀 한 번 더 올리며 나는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 아니 내가 뭐 막 돼먹은 놈도 아니고, 오늘이 집 사람 생일인데 어제 저녁 늦게 들어... ’ 이렇게 말을 이어 가는데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요원은 또 다시, 안됩니다! 라고 모내기 할 때 줄잡는 사람이 논두렁 끝에 못줄 박듯이 척! 하고서는 강한 거부의 말뚝을 박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되게 민망하대요, 이잉.

그래서 나는 잠깐의 어색한 침묵 후,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뜩이나 듬성한 머리칼이 땀에 절어 소가 혀로 쓸어 핥은 보리밭 같은 두상을 손으로 한 번 쓸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이번에는 사정조로 옆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던 두 다리의 각도를 바꿔서 더 공손한 자세를 만들며 말했습니다.

‘ 하이, 이 사람! 아니 입장을 한 번 바꿔놓고 생각해봐! 내가 여기 서 있고 자네가 내가 되어 집 사람 생일인데 늦어서 꽃을 못 사... ’ 이러는데, 이번에도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공익요원은 안됩니다! 라고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다시 말하길, 그러면 경고먹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는 꽃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말을 꺼낸 내가 거절당하는 이 순간에 대한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문제는 이 공익요원의 벽창호 같은, 나바론 요새 같은 난공불락의 잘못된 신념이 문제였습니다. 그 요원은 오늘 아침에 써야 할 단어로써 안됩니다! 말고는 달리 더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할 수 없이 터덜터덜 뒤돌아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슨 창피인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뛰다 말아 땀도 식어가니 정말 내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몇 걸음을 옮기던 나는 갑자기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땅 바닥을 헤집어 주먹만한 짱돌 두 개를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망설임 없이 담장의 넝쿨 장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들고 있던 짱돌 두 개를 왼손, 오른 손에 하나씩 거머쥐고 장미꽃 줄기 하나를 향해 맞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마음이 조급해서 들고 있는 돌멩이 두 개가 정확히 마주치지 않아 몇 번 헛 짱돌질을 하는 사이 그 공익요원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 우이씨, 아저씨이이이!’

달려오는 요원을 바라볼랴, 짱돌질 하는 돌멩이 두 개의 각도를 맞추어내랴, 나의 호흡은 가빨라지고 어깨의 근육이 요상한 각도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의 짱돌질로 나의 성스러운 장미 줄기 밑부분이 형편없이 뭉개지고 난 후 드디어 장미 줄기가 두 짱돌 사이에서 뚝! 하고 간밤의 비에 흠뻑 젖은 아스팔트 위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황급히 들고 있던 짱돌을 버리고 부러진 장미 한 송이를 집어 들고서 그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이 예측불허의 공습에 허를 찔린 게 분하고 원통해 죽을힘을 다해 내달아 오는 데 이미 나의 전방 7-8 m까지 접근해 있었습니다. 그 요원은 분노와 허탈이 묘하게 섞인, 내가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괴상한 형태의 눈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짱돌질로 줄기 아래가 형편없이 문드러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그 요원을 향해 소리를 내지름으로써 내 본심을 다 들어냈습니다. ‘ 자, 잡아, 잡으라고! 나는 시방 이 장미 한 송이가 엄청 중요하다고!’ 그러고 나서 나의 생애 최고 빠른 속도의 줄행랑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라토너의 능력 발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껏 그렇게 빨리 내달려 본 적이 없는 내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내 몸을 숨기기 위해 간밤에 내린 비로 질퍽거리는 비닐하우스 동과 동 사이 흙무더기 길로 방향을 바꿔 철부덕 거리며 죽어라 내달렸습니다. 큰길을 피해 버스 종점 뒤 주택가로 접어들어 미로같은 골목길로 숨어들었습니다. 입에 침이 바싹 마르고 가슴에 통증이 왔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니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골목 전봇대 뒤에 숨어 있어 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방금 한 짓이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정상적인 행동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왜 나는 하는 짓마다 이런 짓일까? 그러나 그러면 어떻습니까. 아내의 생일 아침에 아내에게 꽃 한 송이 가져다 바치겠다는데... 풀린 긴장으로 허전한 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들어와서 문을 여니 아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합니다. 늙어 가지고 무슨 편지를 그렇게... 그런데 무슨 장미예요? 그것도 하나 달랑? 줄기는 뭐가 물어뜯은 것 같이 다 문드러지고? 뛰다가 어데서 주운 거예요? 당신?

나는 모자를 벗으며, 두 손을 양 팔 뒤로 꺾어 땀에 흠뻑 절은 입고 있는 셔츠를 벗고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며 중얼거립니다. 아이고, 각시 생일 챙겨주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웬... 

알아듣지 못한 아내가 건성으로 말합니다. 네? 그러니까 내가 맨날 뭐라고 해요. 
이제 천천이 조금씩만 뛰라고... 뭐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죽자 사자 뛰어요? 새벽에...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춘포
박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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