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꾼의 세월 가늠 뜀꾼은 어떻게 세월의 가고 옴을 느끼고 있을까? 네, 달리면서 주변 경관을 마음껏 볼 수 있으니 사시사철 주변 수목의 변화에 민감한 분이라면 누구나 큰 공 들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민감하신 뜀꾼이라면 긴 인동의 겨울을 지나고 신발의 바닥 창 밑에 감지되는 기생의 젖무덤 같은 흙의 부드러움을 느끼면서 봄을 알게 될 터이고, 욱! 하고 땅에서 위로 솟구치는 지열을 호흡하고선 여름이 바로 앞에 왔음을 느낄 터이고, 그리고 더 민감한 달림이라면 새벽의 뜀질을 마치고 동네 어귀 노인정 앞에 놓인 운동기구에서 등을 대고 하늘 보며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할 때 나무 가지 맨 끝이 말려 올라감을 보고는 가을을 느끼며, 매일 아침 뛰는 그 길에서 어느 날인가 동남풍이 북서풍으로 바뀐 풍향을 보고서는 겨울이 또 다시 저 곳 북녘 산 너머에서 매복하고 있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그 대열에 끼인 지극히 평범한 한 달림이이지만, 저는 또한 이런 방식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합니다. 우선, 긴 긴 겨울을 지나 두 겹 트레이닝복을 벗고 반바지 차림으로 뛰기 시작하는 봄이되면 반바지가 내려가는 그 곳 선 아래는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지기 시작해서 겨우 내내 두꺼운 복장 속에 꽁꽁 숨어 햇빛을 보지 못해 제법 허옇게 된 다리 정강이 살색이 변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더 더워지면 반바지는 더 짧은 바지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러면 햇볕에 그을린 자국은 그 짧은 바지 길이만큼 더 올라옵니다. 이 변화는 평소 뜀질 동안에는 잘 알지 못합니다. 뜀질이 다 끝나고 땀에 젖은 옷을 벗어 세탁기 안에 던져놓고 소나기(샤워)를 시작하며 몸뚱이 위에 떨어지는 소나기 물방울을 바라볼 때만이 그 변화를 알게 됩니다. 7, 8 월 폭염을 뚫고 아주 열심이 뛴 달림이는 이 변화를 더 쉽게 알아차립니다. 아주 짧은 타이즈로 한 여름을 뛰어 보세요. 그리고 목욕탕에 들어가 소나기를 하시면서 자기 다리를 한 번 내려다보세요. 햇볕에 노출된 다리 아래 부위와 타이즈에 가려 햇볕이 투과하지 못한 허벅다리 부위의 경계선이 얼마나 선명한지 금방 알아차리게 되지요. 그러다가 바람이 선들선들 해지면서 다시 바지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면 그토록 선명했던 타이즈 경계선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네,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긴긴 동계 훈련으로 접어들지요. 불과 며칠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는데 내 허연 허벅다리와 무릎 아래는 어느새 경계가 가물가물 해지며 내년 봄 또 다시 짧은 반바지 올 때를 기다립니다. 내 신체를 가지고 느낄 수 있는 기묘한 계절변화 감지 방법입니다. 오늘 아침도 새벽 뜀질을 끝내고 욕실에 들어가 소나기를 시작하며 내 몸뚱이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다가 희미해진 두 다리의 햇볕 기준선을 바라보면서 아, 황홀했던 지난 여름 몽골고비 울틀라 마라톤 225km 뜀질 추억도 이제 과거라는 이름의 앨범 속으로 묻히고, 뜀꾼의 한 해는 또 이렇게 세월의 강을 건너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쉬운 한 해의 마라톤 계절이 서서히 가고 있습니다. 머리 위부터 쏟아져 흘러 내려오기 시작하는 비누 거품 속으로, 정강이의 여름과 겨울 경계선을 타고 넘으며 아름다웠던 지난 한 해 마라톤의 추억이 묻히고 있습니다. 뜨거운 욕실 안, 눈 앞 자욱한 수증기로 보이지 않게 된 거울 앞에 섰습니다. 물묻은 손바닥으로 쓱쓱 거울을 밀어 비누 거품으로 칠갑을 한 내 얼굴을 갖다 댔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나타난 내 얼굴에서 지난 여름을 면도질하며 나는 가는 세월을 가늠합니다. 정강이의 희미한 경계선을 타고 느리게 흐르는 비누거품 물을 통해, 나는 지금 금년 한 해 마라톤 세월의 왔다 가고 있음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춘포 박 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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