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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내 조국 대한민국 그리고 울트라 마라톤 등록일 2016.10.11 05:35
글쓴이 박복진 조회 2212




내 조국 대한민국 그리고 울트라 마라톤

안녕하십니까.

춘포
박 복진입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은 내가 자라 귀가 뚫리면서 듣고 안 지식으로 항상 초라하고 가여운 모습
바로 그 자체이었다.  좀 더 자라면서는 이 가여움이 분노와 비탄으로도 번져 나갔다.
왜 우리는 뙈놈과 오랑케 그리고 쪽발이 왜놈들에게 그 많은 침란을 당해야만 했는가?

힘이 부족하면 달려들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머리가 부족하면 그 머리를 돌도끼로 써서
라도 그들의 가슴팍을 찍어 눕히지 못했는가?  이 조국 강산을 유린하려한 왜인에게 어찌해서
단 한 명의 생명이 살아남을 때 까지 왜 저항하지 못했는가?  왜 원수의 간을 생 주먹으로
파서 도려내어 허공에 뿌리며 재침을 막고 신성한 우리의 조국강산을 온전히 지키자는
결의를 하지 못하고 또 그 결의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가?

힘없고 말 못하는 민초가 무슨 죄가 있어, 전란이 끝나고 도성에 돌아온 관리는 식솔의 명
줄을 위해 침입자에게 부역한 백성을 추려내어 치도곤을 하고 오랑케의 수욕을 채워주는데
동원된 아녀자를 화냥년이라고 치부해 구중산골로 내몰아 칡뿌리로 연명하다가 엄동설한
눈구덩이에 짐승의 한 끼 식사가 되게 하였는가?  왜병의 배설구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당하고 살아있는 목숨 끊지 못해 숨쉬며 비탄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네 누나, 언니들은
왜 일본 대사관 앞 노천에서 수요일마다 모여 피 튀기는 절규를 해야만 하고 그렇게 내몬
내 조국은 왜 그들 앞에 전경의 방패를 들이대어 그 모습을 숨기려하는가?

내 어설픈 분노의 대상은 아름다운 금수강산 이 땅을 유린했던 침략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남들은 땅을 파서 지하로 철길을 만들어 200 년 후를 내다보며 자기 나라의 부를 건설 할
때 우리의 궁궐에서는 안방에서 속닥거리는 밀담을 장지문 밖에서 엿듣고 툭하면 역모라는
올가미로 너를 죽이고 그러고 나서 나 또한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하곤 했는가?  산자의
죽임만으로도 부족하여 죽은 자의 시체를 파서 다시 육시를 해대는,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증오를 같은 형제, 자매 동족에게 하였는가?  

유엔의 사무총장에 출마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국민을 밉게 보였다고 끌어 내리려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는 우리의 누구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돈 들여가며 사절단을 보내
그 놈에게 상을 주지 말라고 로비를 하는, 이 세상 천지에 그런 바보 천치 같은 짓거리를
해대어 뭇 세계인의 비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는가?  도대체 그들은 누구이었던가?


조국은 불쌍했고, 그 조국 위에서 살고 있는 내 동포는 항상 동정스러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나마 복 받은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계절의 화사함과 수려
함 속에 짙게 깔린 말 못할 비통함은 감춰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건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내 나이 더 들고 늦은 철이 들면서 생각은 바뀌어져 갔
다. 내 태어나 내 자란 나의 조국은 나에게 절대적이었다. 시비를 매길 수 없으며 값을 따
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나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모든 이들은
장삼이 다 예쁘고 이사가 다 귀여우며 김가 이가 박가 가릴 것 없이 다 내 혈육이오 내 동
포이니 어쩌란 말인가?  내 조국 산하는 논다랑이의 풀 한포기,  졸졸 시냇가의 물 한방울
이 다 내 살붙이려니 내 더 이상 어쩔 것인가?

호구책으로 무역한답시고 오 대양 육대주를 떠돌아다니면서 나의 생각은 더 굳어져 갔다.
조그만 일로 내 조국을 비아냥거리는 코쟁이는 나한테 걸리면 국물이 없었다. 모든 서식에
요구하는 국적은 또박또박 대한민국이라고 네 자를 다 채워 썼으며 단 한 번이라도 한국이라
는 약자를 쓴 적이 없었다. 영어의 알파벳을 가지고 으스대는 놈한테는 우리의 두 개가 적
은 한글의 스물 넷 자모로 맞섰다.  내 발음에 진셍은 없으며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인삼
의 발음을 익혀 주었다.  그런가 하면 훔쳐본 그들의 깔끔하니 세련된 매너를 본받아 고대로
흉내 내어 아시아의 동쪽 끝 소국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 공을 들였다.

책잡히지 않으려 쪼르륵 소리나는 배를 움켜쥐고도 짐짓 잘 먹은 양 근처 일류 호텔 요리집
의 메뉴를 들먹이며 거드름을 피웠고, 상담을 위해 호텔방을 나설 때는 침 한 방울이라도
구두코에 떨어뜨려 광을 내 내 자존심을 세웠고, 손톱 밑에 실날같은 떼 자국의 유무도 점
검해서 내 품위를 지켰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국의 한 복판 백화점에 내 신발을 15 여 년
넘게 팔아 내 조국에 외화벌이를 해 날랐다.

그렇다. 수많이 살다 간 나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이 조국 산하에서 태어나
이 강산에 부대끼며 이 흙을 밟고 이 흙 위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 땅에 내 육
신의 재를 뿌릴 것이다.  여기는 내 엄마가 날 낳으신 나의 모국이며 내 아버지가 날 길러
주신 절대 신성불가침 내 조국인 것이다.

이 조국의 산하를 동서로 가르는 한반도 횡단 길을 내 두 발로 뛰어 본다니...
무박 4 일 동안 내 온 육신의 혼과 령으로 핥으며 보듬고 안고 더듬으며 뛰어 본다니...
조국의 산하야, 기다려라!  내 자라 오늘이 올 줄 어떻게 알았더란 말이냐?

서해에서 동해까지 동서 칠백 칠십 리,
강화도 창우리 선착장 출발지에서 건네받은 배번에 선명하니 인쇄된 한반도 횡단 308 km,
무박 64 시간, 의 글씨가 들떴던 내 가슴에 만량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옷핀의 끝을 펴서
내 가슴에 다는 배번의 네 귀퉁이는 아무리해도 바르지가 않았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정말 바라건대는 조국은 날 이대로 그냥 안아 줄 것이다.

밤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주변이 어둑어둑 해지며 186 도전자 주자들의 머리 위에
울트라의 불이 밝혀지자 출발 신호가 울렸다. 그리고 나는 출발 했다. 무박 4 일, 64시간
의 내 조국 산하의 허리를 보듬고 핥는 대 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라톤을 하며 어렴풋이
품었던 내 조국 산하 횡단 마라톤의 꿈.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강화읍을 지나며 한 무리의 울트라 동료들이 식사를 위해 대로변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렇다. 이제는 초장이다. 배를 채워야 첫 이 밤을 밤새 달리고 내일 아침에는 하남시의
100 km 지점에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지나쳤다. 어쩐지 배고픔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고픔보다도 매 50 km  지점에서의 제한 시간이 나에게는 더
무서웠다. 나는 길을 서둘렀다.

배낭 속의 한 줄 김밥을 우직우직 입속에 밀어 넣으며 뜀질을 계속했다.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이 비는 양동이 물로 바꿨다.  기분이 좋았다. 이 비
는 내 몸속에 감춰진 야성을 자극해줬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나는 느긋했다.
씹는 김밥이 목구멍에서 미처 다 씹히지 않아 걸그적 거리자 나는 주저 없이 남은 밥 알갱
이를 길바닥에 뱉어 버렸다. 지금부터 내 앞 길을 막는 그 무엇도 나는 걷어치우고 앞으로
의 전진만 할 것이다. 너덜너덜 실밥이 다 헤진 모자 차양에서 빗물이 쏟아진다. 동대문에서
사서 그 모자 위에 단 우표 딱지만한 태극기는 비에 젖어 청적 색깔이 점점 선명해져간다.
그리고 완주를 위한 내 전의도 더 불 타들어간다.   

마라톤 거리 정도 가니 어둠 속에 외국인 한 분이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며 달리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온 크파 호키앙아 이었다. 그는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며 달랬다. 뒤쳐지는 그를 위
해 몇 번의 뒷걸음질 후 나는 그를 50 km 지점  주자 확인점 위에 눕힐 수 있었다. 미안
했지만 뒤에는 이제 많은 주자들이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고 달래며 나는 치고 나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150 km  지점에서 뜻을 접었다.  자기 생애 최초의 경기 포기
라고 하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는 양동이 수준을 넘어 이제 아나콘다 몸통 굵기의 호스로 퍼 붓는 펌프 물 수준이었다.
아스팔트 가장자리 배수구를 향해 쏟아져 흘러내리는 빗물 줄기를 거스르며 철벅, 철부덕 !
나는 영락없는 북괴의 124 군 훈련요원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런 나의 얼굴에 지나가는
버스가 튀기는 흙탕 빗물이 내 왼쪽 얼굴 위에 사정없이 휘갈겨졌다. 상관없었다. 하얀 면
장갑 낀 손바닥으로 쓰윽 한 번 문지르고 그냥 웃었다. 입속에 잔 모래 자갈이 씹혔다.

이번 한반도 횡단 긴 여정 중 두 번의 옷과 신발을 교체할 수 있는 지점 중 그 첫 번째
100km  도움막에 다다랐다. 그러나 따뜻한 옷을 갈아입고 젖은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있
으리라는 기대는 날아가 버렸다. 맡겼던 가방을 건네받으니 가방 속에 빗물이 가득, 쓴 웃
음이 나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몸은 젖고 또 앞으로도 더 젖을 것이다. 그것보다도 밤새
맞고 온 비로 쏠린 사타구니가 몹시 쓰라려 바세린을 한 움큼 건네받아 바지를 열고 사타구니
에 도배를 했다.  이런 날씨에 이렇듯 밤을 새우며 주자들의 건강을 챙겨 주시는 달리는
의사들의 김원장님의 손길이 더 없이 고귀해 보인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맙지만 나는 또
내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 외 탈락.  나의 적은 이것이었다. 나의 뇌속에는 이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들어 차 있질 않았다.

팔당대교를 건너서는 다섯 개의 긴 터널 속을 연속해서 지나가야했다. 100km  도움막에서
김 원장님으로부터 지급받은 귀마개는 배낭에서 꺼내기가 싫어 그냥 갔다. 그런데
갑자기 핵폭탄이 터지는 굉음이 울려 나는 혼비백산,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붙잡을려고 터널의 벽을
더듬으며 그 자리에 섰다. 관광버스 한 대가 웬일인지는 몰라도 경음기를 눌러 그 소리가 터널
안에서 공명을 해 내 귀막을 찢어 놓을 듯 크게 들렸다. 뛰던 발길을 멈추고 그 버스
기사를 노려봤다. 밤을 세워 달려온 피로감. 양동이로 퍼 붓는 빗속을 뚫고 빗길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버텨온 오기, 내 앞을 막는 그 어떤 장애물도 나는 용서가 안 되었다.

추석 날 아침, 귀성객들의 차량 정체로 차는 범퍼와 범퍼가 닿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바닥을 더듬어 돌멩이를 찾았다.  무언가 던질 것을 찾았다.  없었다. 금방 터널 벽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붙잡으려 허우적거려 하얀 면장갑에 시커먼 껌뎅이 매연이 묻은 장갑을
벗어 그 운전사를 향해 버스 앞 유리창 정면으로 던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다.
돌아서서 서너 걸음 가다가 나머지 왼손 장갑도 벗어 다시 그 버스 운전사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너 이놈아,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더란 말이냐?
컴컴한 터널 속을 뛰는 주자가 보이지 않더란 말이냐, 이 노옴아!

끼고 있던 장갑을 돌팔매 삼아 던져버린 나는 그리하여 한반도 횡단 나머지 200 여 km 내내
맨손으로 달리며 이마의 땀도, 흘렀던 눈물도 맨 주먹으로 훔쳐야했다. 작은 일에 분노하는
나는 아직도 도 수준에 이르기는 글렀다고 두고두고 머릿속에 반성문을 써댔다.  

팔당에서 양평 읍네 입구까지의 직선거리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포기
자 110 명 중 이 구간에서 거의 절반이 뜻을 접었다했다. 그 다음 양평에서 150 km 주자확인
지점까지는 정말로 피를 말리는 끈기의 시험무대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이미 사타
구니의 쏠림현상은 극에 달해 한 걸음 한 걸음은 비명을 행진곡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횡단
길에서 맨 처음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건 사타구니 쏠림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
미 부풀어 오른 발뒤꿈치, 앞 발가락의 물집 풍선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탈락될지도 모른
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 가자! 어서 가자!  비는 그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 부어댔고
사타구니 쓰라림 때문에 나는 한동안 갈지자를 그리며 요상한 자세로 달리기를 계속했다


주자들이 거의 멈춰 식사를 하고 가는 기분 좋은 휴게소라는 이름 좋은 휴게소. 나는 그냥
통과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제한시간 외 탈락이었다. 나는 무슨 수
를 써서든지 탈락의 쓴잔은 마셔서는 안 되었다. 누구 목을 따는 한이 있더라도 탈락은 있을
수 없었다. 탈락, 탈락, 나는 이 단어를 뇌일 때 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최면
을 걸었다.

최면으로는 부족했다. 150 km  지점의 제 3 주자 확인지점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머얼리 어쩌면 내 가족 이상으로 내 선전을 기원하고 있던 나의 울트라 동료들의 모습이
히끄무리하게 보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왜 이 구간에서 그토록 많은 주자들이 포기를 결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두 번째 밤이 시작되었다. 앞선 주자의 깜박이가 멀어져간다. 극심한 허기가 몰려온다.
이 밤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나는 동료와 짝을 맞추어 뛰어야할 것 같아 갓길의 배수구 턱에
걸터앉아 후미 주자를 기다리며 또 다시 깁밥 한 줄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내 뜀 질을 위해 태울 불쏘시게라는 생각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아구리에 쳐 넣었다.

비는 또 다시 억수같이 쏟아졌다. 야성을 살려준다는 어줍쟎은 사치스런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아, 제발 좀 그쳐 주었으면.  조금이라도 , 몸의 어느 한 구석만이라도 보송보송
한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가면서 보니 군데군데 버스 정류장이라고 해 비를
피할 수만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주자들이 앉은 자세로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연했다.
히말라야 죽음의 고지 위에 널부러진 눈구덩이 속 시신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내 머리에는 더 이상 그날 밤의 기억이 없다. 그저 뛰고 또 뛰었다는 기억뿐. 거리를
좁혀간다는 사념도 없었다. 그저 이 밤 내내 뛰다보면 날이 샐 것이고 날이 새었으면 거리는
좁혀졌을 것이고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나는 밤을 허우적거리며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만
되뇌였다.  그러자 황재인지 횡재인지를 넘어 200km 확인점이라는 둔내 휴게소 앞에 주자
유도등 같은 게 뒤집어 쓴 바람막이 비옷 후드사이로 보였다. 아, 내가 다시 200km를 뛰었
구나.  지난 3 월 모래 강풍을 뚫고 제주도 일주를 했던 바로 그 거리 200 km 를 다시 뛰
었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나를 얼싸 안아주며 둔내 휴게소 안으로 안내 해 주는 나의 울
트라 동료의 어깨가 그렇게 클 수가 없었다.

밤으로 치면 두 번 째 밤, 날 수로 치면 셋째 날,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은 듯 했다.
양말을 벗어 발바닥, 발가락에 응급 처치를 하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침착, 침착,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정신을 차리려 가끔씩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기억을 되살렸다. 준비해온 알콜 솜에 바늘을 찔러 소독 과정을 거치고, 그 바늘에 실을 꿰어
내 발가락 마디마디의 물집에 걸쳤다. 발바닥은 참혹했다.  모내기를 위해 마당에 준비 해 놓은
못줄에서 본 나이롱 실 표식 같이 너덜너덜 검은 실이 발바닥 여기저기에 꽂혀 있었다.
휴게소 안은 이동야전 외과 병원 같았다. 지칠대로 지친 주자들이 여기저기 몸뚱이를 내다 꼰지
고  토막잠을 위해 널부러져 있었다. 한 시간만 자고 싶어 눈을 붙혀 보았으나 잠이 올 리 없었
다. 끈적끈적 젖을대로 다 젖은 몸은 시간이 지나며 한기만 더해 줄뿐 쌓인 피로를 덜어내 주지
는 못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그냥 일어났다. 그리고 주섬주섬 젖은 양말을 다시 끼고
머리 위의 램프 꼭다리를 왼쪽으로 돌려 불을 밝히고 다시 주로에 섰다.

잠깐의 휴식으로 약간은 꼬들꼬들해진 사타구니 부위 쏠림현상은 다시 뜀을 계속하자 상처에 소
금을 뿌린 듯 화끈거려 뛰는 자세를 요리저리 취권과도 같이 변형해 보지만 안타까움만 더했다.
불과 2 - 3 km  도 못가서 나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반대편 주유소 화장실을 어그적 거리
고 들어갔다. 영락없는 산부인과 현관 앞에서 양수 터진 임산부 발걸음이었다.

흙발자국 어지럽게 더럽혀진 시골 동네 주유소 화장실 안에서 나의 처연한 자가 쏠림치료가
시작되었다. 배낭에서 키네시오 테잎을 꺼내고 비상용 소형 칼을 꺼내 젖어서 늘어지는 테잎을
한쪽은 이빨로 물고 한 쪽은 손으로 잡고 잘라서 벌건 고추장 묻은 주걱 같은 상처투성이 허벅
다리를 감쌌다. 또 다시 길게 네 개를 잘라서 볼따구니에 붙였다가 다시 하나씩 떼어 붕알을
십자가처럼 얼기설기 쌌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정글에 낙오된 종군 여기자가 귀순 삐라 종이로
생리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더럽고 오물 투성이인 시골 주유소 화장실.....
눈물이 터졌다. 나는 울면서 나머지 처치를 다 끝내고 휴게소 문을 밀치며 나왔다. 나오면서
흘낏 보니 문짝에 붙은 그림은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용 화장실이었다. 상관없었다. 나는 완주
해야 된다. 나는 탈락해서는 안 된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아들아,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  

그렇게 또 하루 밤을 나는 보내고 3 일째 낮을 맞았다. 쏠림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정도의 고통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250 km를 넘으며 발생된 발목 부기
가 내 몸의 그 어떤 다른 고통도 다 반죽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서웠다. 한 뜀, 한 뜀 마다
도끼로 발등을 찍어대는 고통은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아, 어머니...  아 , 어머니... 이제 여기서 내 뜻을 접어야 됩니까?
군대 생활 3 년 내내 사병 봉급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제대 날 당신 손에 몽땅 쥐어드렸던
그 날 어머니는 날 보고 말씀하셨지요.  아가야, 너는 발가벗겨 눈구덩이에 내놓아도 살 것
같구나. 그러면 어머니, 저의 지금 이 고통은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네, 어머니??

중앙선의 하얀 가드 레일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아스팔트에 드러누웠다. 지나가는 차량에 내 머리
통이 박살나는 장면이 끊임없이 나를 일으켜 세우려하지만 나는 일어 설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뿔 책받침을 반 접어 양손으로 수 없이 꺽으면 나중에는 그 자리가 허옇게 변하고 다
음 단계에서는 뚝! 하고 부러진다. 내 다리는 이미 한계상황을 넘어 너무 많이 뛰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뜀
을 시작해 보지만 자세가 너무도 빈약했다.

제한시간 외 탈락 검은 그림자가 날 다시 엄습했다.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뜀이 멈춰지면 어김없이 발목 부기는 날 잡아 먹을 듯 덤벼왔다. 이 고통
을 그나마도 이기는 방법은 뛰는 것이다. 뛰어라, 육신아, 더 뛰어라 내 몸뚱아!! 나는 절규했다.

이미 두 밤 세 날을 도로에서 보낸 나는 핏빛으로 충혈된 두 눈의 소유자가 되었다. 완주에의 집
념 하나로 똘똘 뭉친 내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주로에서 만나는 주자마다 나는 같은 질문만
되풀이했다.  지금 이 속도로 뛰면 시간 내 완주는 가능합니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와 같
은 시간대 그곳을 통과했던 나의 울트라 동료는 나에게 상기해 주었다.  그 날 밤 박복진님은
시간 내 완주를 할 수 있겠느냐고 저한테 꼭 다섯 번을 물으셨어요. 기억나세요??

다시 세 번 째 밤은 찾아왔고 이 밤은 나의 남은 생애 전체를 통털어 영원히 잊지 못할 밤, 고통
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뼈 마디, 마디, 근육세포 줄기, 줄기, 신경세포 말단, 말단에 각인
시켜 주었다. 자정 즈음 도착한 마지막 주자 확인 지점 280km 대관령 구 휴게소에서 경포대 완
주선까지 불과 28 km를 물경 8 시간 58 분간 나는 내 지나온 삶 그 어느 순간에도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극한상황을, 앞, 뒤 좌, 우 아무런 인간의 흔적이 없이 나 홀로 고통의
나락 끝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얀 가드레일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운 게
무릇 그 몇 번이며 그러다가 머리 위 램프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코스 지도는 비에 젖어 너
덜 너덜 다 헤져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맞는지 안 맞는지,
단 2m 만 길을 잘못 들어 다시 가야 한다면 지체 없이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극한 상황,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다.

캄캄한 도로, 길가 이정표를 읽으려고 지나가는 자동차 전조등을 기다리길 몇 번이나 했던고.
어쩌다 지나가는 택시에게 손을 들어 길 물으려 하지만 쌩- 하고 그냥 내 달리는 택시를 향해
얼마나 큰 소리로 육두문자를 날려 댔던고....  시간은 이미 걸어서 가도 완주시간 안에는 들어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되었지만 단 몇 백 미터를 더 가다가 영영 주저앉을 것만 같은 불
안감에 그 얼마나 초조해하며 나를 다그쳤던고...  가자! 어서 가자!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을
때 한 발이라도 어서 가자.  그리하여 최후 몇 백 미터 앞에 내가 쓰러지면 내 몸뚱이를 굴려
서라도 갈 시간을 벌어놓자.  가자, 아가야, 어서 가자 대한민국의 착한 아가야!!!

발목 부기가 너무 심해 지팡이를 찾았다. 길가 새로 심은 가로수를 지지해 주는 지지대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 지지대는 철사로 칭칭 감아 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다른
나무에 달라붙어 지지대를 빼려고 용을 쓰지만 허사이었다.  시간만 허비했다.

날이 뿌옇게 새고 내 정신은 내 육체를 앞질러 강릉 시내에 접어들었다.
울음이 나왔다. 아, 세 번째 밤도 나는 이렇게 보냈다. 길가의 수많은 나무 그림자들이 하나같이
사람 형상을 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내 앞에서 포기의 요기를 부렸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이 내 눈꺼풀을 강제 폐쇄할라치면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뜻도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뛴다고 했지만 이미 뛰는 자세는 나오지 않았다.
길게 울었다.  통곡했다.  조금 있으면 완주선에서 날 기다릴 아내와 아들을 보면 쏟아질 눈
물을 나는 미리 쏟고 가야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된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우아하게
완주선에 들어 가야한다.

길가 주유소 화장실에 들어가서 배낭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비치해 놓은 싸구려 비누에 물을
묻혀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았다. 세수도 했다. 4 일만의 세수였다. 눈썹 위에 한 방울 물방울을
검지손가락으로 훔쳐 바닥에 떨쿠고 다시 배낭을 걸쳤다. 겨드랑이의 쏠림으로 벌겋게 변한
속살이 눈에 확 들어온다.  3 일 밤 4 일 낮 불에 달군 이글이글 용접봉 끝 같은 충혈된 두 눈이
태극기 자수 달린 모자의 차양 밑에서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2 km 남짓, 시간상으로 나는 3 시간 여 여유를 부리고 완주선을 밟을 것이다.
지난 3 일 밤 4 일 내내 시간 외 탈락을 걱정하며 정식 식사 단 두 끼, 농가의 비닐하우스
에서 새우잠 딱 50 분, 그리고 둔내 휴게소에서 오한을 느끼며 토막 잠 30 분. 그리고 대관령
오기 전 어느 버스 정류장 나무 의자에서 7 - 8 분, 이렇게 짜게, 짜게 나를 휘몰아쳐 내친
대가는 정말 컸다.

그토록 걱정하고 또 걱정하며 나를 긴장시킨 제한시간에서 나는 3 시간 여를 벌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는 횡단 완주 그 자체보다 내 능력 그 밖을 넘본 초인적 인내심 3 시간이
더 소중해 보인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준 주로상의 내 울트라 동료들. 긴긴 밤 내 아내와
내 아들 이상으로 나의 무사 완주를 기원해 준 울트라 선배 고수 제현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기회를 열어준 우리의 용감한 울트라 선구자들...

아, 저 멀리 경포 해수욕장의 해송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관령 고개 정상에서 강릉 시내의 불빛을 보며
아내에게 전화했었지. 전화 전에 눈물을 다 쏟고 바싹 마른 감정 없는 언어로 조용하게 말했었
지. 몇 번의 연습으로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며 말했었지.

“ 나야. 대관령 정상이야. 이제 완주 할 것 같아....  올 수 있으면 와봐...  응 응.. 괜찮아...”

그 전화 받고 달려온 아내와 아들이 저곳에 있겠지. 그렇게도 출전을 말리려한 아내가 저곳에
있겠지.  예민한 신경으로 지레 병치례를 했었던 아내가 저곳에 있겠지. 나는 이번의 완주
마지막 순간에도 역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갈 것이다. 내 지금껏 마라톤 시작 7 년 여,
단 한번도 완주선에서 아내 이름 부르기를 빼먹지 않은 그 기록을 또 이을 것이다.

경포 해수욕장 모래바탕 끝, 동해 바다가 넘실대는 저 곳에 완주를 알리는 플래카드의 글씨
가 선명하니 보인다. 내 조국 대한민국이 가을날 아침 새벽 공기를 한 아름 내 콧궁기에 밀어
넣어주며 마지막 몇 걸음에 힘을 주시고 계시다.  아, 내 조국! 나는 내 조국을 온 몸으로
느꼈다. 결코 아무도 넘 볼 수 없는 내 사랑 내 조국의 이 상쾌한 아침 공기. 이 햇살.

나는 내 사랑하는 나의 자랑스런 조국이 있어 좋다.
나의 사랑스런 동포, 형제, 자매가 있어 좋다.
내 육신의 재를 뿌릴 강산이 있어 좋다.

나는 해 냈다는 성취감으로 충만된 내 야윈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2005 년도 한반도 횡단 울트라 마라톤 308 km 완주 테이프를 가슴에
걸쳤다.

“ 영희야 !!!! ”

자, 이제 다 왔다.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고 싶다. 그러나 마음 뿐 내 두 손은
극심한 탈진으로 올라가지 않고 곁의 아내와 아들이 잡고 있어 그냥 거기 덜렁 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나의 울트라 동료들의 진한 축하를 받으며 사진이 찍혀
지고 꽃다발이 건네진다.  아, 제한시간 64 시간에서 나는 60 시간 44 분으로 ,
총 도전자 186 명 중 기권, 탈락 110 명을 제한 76 명 완주자 중 35 위로 들어왔다.

거기서 그렇게 내 조국은 날 안아 주었다.


춘포,

박 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www.ohmyshoe.com

 

2005 년 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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