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시인에게 보내는 완주 편지
핀란드 종단 울트라 마라톤 225km (3)
K 시인아!
핀란드 울트라 마라톤 225km 대회, 날수로 치면 셋째 날. 우리는 잔자갈과 부드러운 흙으로 다져진 흙길 신작로를, 양옆에 아름드리 자작나무, 소나무들의 열병식을 받으며 러시아 국경까지 42km를 달렸다. 국경이라고 해봐야 버킹엄 궁 경비병의 입초 초소만큼 작은 것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제주 주민들이 외출시 대문에 걸쳐놓는 막대기만 한 진입금지 가로막대가 전부였다. 그 막대도 신작로 폭을 다 덮지 못하고 끝은 허공에 떠있어, 마치 우리에게 러시아 국경을 한 번 넘어보라고 유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발의 그림자만 넘어도 그 때부터는 러시아에 끌려가 남은 생을 장담 못한다하니 나는 벌벌 떨리어 국경선을 나타내는 선 앞에서 기념사진 하나 찍지 않고 뒤돌아 다시 뛰었다.
국경. 우리에게 국경은 남과 북의 초긴장이 상존하는, 서로가 서로를 꼬나보고 단 일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죽고 죽이는 현장이다. 판문점 남북 공동 관리소에 갔었을 때 보니, 세로로 길게 지은 건물의 반 토막은 남, 그 나머지 반 토막은 북 소속이었다. 그곳을 지키는 헌병의 두 주먹은 북을 향해 불끈 쥐어진 채였다. 거기에서는 그게 경비 근무수칙이라고 했다. 무기 반입이 안 되는 비무장지대여서 여차하면 주먹으로라도 때려눕혀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여기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을 보니 나의 국경에 대한 상식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핀란드와 러시아도 결코 순한 사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느슨하다니. 더구나 그 일대는 핀란드와 러시아가 겨울전쟁이라고 불리는 치열한 전쟁을 치루어 5만 여 군인이 전사한 곳인데도 말이다.
그곳은 전쟁사에서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도 핀란드인들에게 잊지 못할 곳이라고 했다. 5,000 정도의 소수 열세인 핀란드 군인이 그 열배에 달하는 50,000의 러시아 군인들을 물리쳤던 곳이라고 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는 나는 다른 각도로 그곳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런 훌륭한 전승지에 우리나라에서 그 흔한 기념탑이나 기념관이나 동상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죽은 군인들 숫자만큼의 큰 돌만 여기 저기 마구마구 흩뿌려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 돌은 다듬거나 가공된 돌은 아닌 성 싶고 그저 발파석같이 주변에 흔한 커다란, 크기로 말하자면 임꺽정이 온 용을 다 써도 못 들 크기의 커다란 바위 쑥돌이었다. 그 당시 이렇듯 죽어나자빠진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는 뜻일까? 이렇게 전쟁은 사람의 품위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일까?
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작가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이해해주고 받아드린 핀란드인들이 참 위대해 보였다. 작가는 여기 이 전쟁의 참상을 너무도 잘 표현한 것 같았다. 이끼가 낀 바위, 잡초들 속에 나뒹구는 발파석 쑥돌. 죽은 자는 이렇게 잊혀지고, 산 자는 그 망각을 살리려 애쓰고. 우스꽝스런 조형물로 싸구려 기념비나 탑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온, 그냥 내팽개쳐진 바위쑥돌의 웅변이었다. 작가로서 이런 작품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위 쑥돌을 두고 작품이라고 관공서에 출품한다면 그래서 그 작품의 대가를 요구한다면 우리나라 관공서에서는 이게 통할까? 이게 뭐야? 돌무더기 여기 저기 갖다놓고 작품이라고 돈을 달라고? 그럴 것 같으면 우리가 구청 청소차로 날라다 놓고 그 작가 출품은 없던 걸로 하면 되겠네.. 라고 하지 않을까? 나는 다소 긴 시간을 할애해 작가의 뜻, 핀란드인의 단순 검소하나 높은 예술에 대한 자세를 눈에 가득 담아 뛰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그곳은 핀란드와 러시아간 수오무살미 겨울전쟁의 현장이었고 나는 그곳을 뛰었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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