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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들려주고 싶은 말 등록일 2020.08.13 05:33
글쓴이 박복진 조회 840

2020. 07. 30

모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 원고

 

들려주고 싶은 말

 

모교에서 나에게, 졸업 후 지금껏 살아온 내 삶, 그 속에 녹아있는 내 도전의 경험과 생각을 재학생들에게 잘 전달해서 후배들의 장래에 큰 보탬이 되는 동기를 부여해 달라고 했다. 대상이 한둘이 아니고 재학생 전부, 짧은 몇십 분이 아니고 장장 두 시간 동안이다. 나의 이 강의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 또다시 기획된 왈, 앵콜 특강이다.

 

남보다 많은 부를 이룬 것도 아니고, 월등한 학식을 갖춰 추앙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권력을 쌓은 것도 아닌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며칠의 고민이 있었지만 지나온 내 삶과 지금의 내 생각을 보태고 뺌 없이 그대로 들려주기로 했다. 강의 원고는 이미 내 머릿속, 내 몸뚱이에 있으니 따로 챙길 것이 없었다.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가락 풍물 연주를 하려고 정성스레 다림질한 사물 복장과 장구만 챙겨 가지고 갔다. 강단 뒤 벽에 몽골 사막을 뛰는 울트라 마라톤 내 모습 대형 사진을 거니 부풀어 묵직했던 머리가 막 해산한 임부의 복부처럼 비워졌다.

 

모교 재학 시절, 학생 생활환경 조사에서 살고 있는 집이 초가인 사람은 손들어! 라고 했을 때 유일하게 나만 손을 들었다. 집에 라디오가 있는 사람은 손들어!라고 했을 때 손을 못 든 사람은 나 혼자였다. 돈이 없어 유도복을 못 사니, 유도 시간이 되면 당연히 앞으로 나가 한 시간 내내 준비물 안 가져온 벌로 무릎을 꿇었다. 죽어서라도 입밖에 안 떨어질 것 같았던 말, 선생님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요, 라고 실토하고 수업료를 반으로 감면받았던 날, 통학 기차에서 내려 어둑어둑한 논길을 걸으며 흘렸던 눈물은 그때 내가 느꼈던 자괴감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돈이 없어 졸업비를 못 내 졸업식장에 못 갔을 때 나는 슬픔이 너무 커서 눈물도 안 나왔었다. 가고자 했던 대학교의 정문까지 갔으나 입학원서를 살 단돈 몇 백원이 없어 돌아서서 걸어오던 내 그림자는 중랑천 뚝방촌 서너 집을 다 덮고도 남아 모가지는 골목 땅바닥 어디론가 패대기 처져 끊어져 있었다.

 

그토록 지난한 환경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 좌절하지 않고 나름 올곧게 굴러온 내 삶의 긍정 수레바퀴는 도대체 어떤 모양의 축이었을까? 너무나도 가파른 해안가 직벽 아래, 그 위의 희망이 보이기는커녕 상상조차 안 되던 시절, 그래도 한 줄기 빛을 찾아 끈질기게 더듬더듬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지난날들, 나를 그렇게 견인한 힘은 어디에서 생성되었을까? 장마철 도로 긴급 복구 공사판 현장 휴식 시간에 가슴을 열어 영어의 단어장, 숙어장을 꺼냈고, 질통에 모래를 담아 이고 나르는 공사 현장의 구멍 뚫린 철판 계단을 오르며 방금 전 외웠던 구문을 되삭임질 했다. 트랜지스터에서 나오는 하루 몇 번 미군 라디오 방송에서 발음을 익혔고, 과월호 팝송 잡지에서 영어 표현을, 무료 배포 영어 선교지에서 영어 문장을 익히고, 주인이 네 번이나 바뀐 헌책 콘사이스 영어 사전을 성경처럼 여기며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향해, 어떤 분노를 삭였던 것일까? 단어와 구문을 질근질근 씹어 삼키며 나는 내 앞날을 뚫고 나갈 돌파구는 오직 외국어뿐, 이를 무기로 삼아 세상을 향해 훨훨 나는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영어를 뱉어내기 시작하자 나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날 수 있는 날개가

주어졌다. 신발 견본을 들고 무역으로 오대양 육대주를 헤집고 다니며 외화벌이를 했다. 교과서의 평면 지도 한 장 지식을 믿고 올라탄 비행기로 실수를 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나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그리고 가야만 할 목표를 놓지 않는 한 닥쳐오는 모든 난관은 나를 오기로 미소짓게 만들었다. 코리아라고 하면 다 아는 줄 알고 으스대던 나를 마치 아프리카 서쪽 어느 소국 출신과 같이 대해주던 그 코쟁이의 당연한 거만은 그동안 얇았던 내 조국애를 더 두텁고 탱탱하게 해 줬다. 들고 갔던 신발을 팔지 못했을 땐 지구 상에는 내가 찾아갈 수 있는 다른 나라가 또 있음을 감사해했다. 허허벌판에 알몸으로 내동댕이쳐진 나는 먹여 살릴 가족 생각으로 낯선 외국 공항에서 홀로 눈물을 찔끔거릴 때도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고되고 험난했지만 닥쳐온 시련은 지나온 것들에 비해 항상 더 작고 더 물러 견딜만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 내 삶의 발판을 만들어갔다. 또 그렇게 해서 34년 만에 기어이 가고자 했던 대학교에 들어가 입학식을 치르고, 영어학부 대표로, 장학금 수혜자로, 신입생 모집 브로슈어 표지에 도전의 표상으로 내 이름과 사진이 올라갔다. 당연하지만 그런 내 인생역정을 글로 토해서 대학생 수기 공모 최우수작에 당선, 상금을 거머쥔 날 나는 내가 그럴싸한 영웅인가, 불운한 못난이인가 알 수가 없어 주르르 혼자 눈물을 흘렸다.

 

42km 마라톤 완주를 버킷 리스트에 올리고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마라톤을 넘어 대한민국 한반도를 횡으로, 종으로 최장 622km 까지를 무박, 무지원으로 완주해서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슬래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3,000m 급 고산 다섯 개를 넘는 대만 횡단 울트라 마라톤 완주, 살인적인 습도와 고온을 뚫고 18시간을 달리는 말레이시아 페낭섬 울트라 마라톤 완주, 지구 상 최악의 조건 몽골 고비 울트라 마라톤 225km 5년 연속 완주, 한국인 최초로 남의 나라인 핀란드에서 북극권 울트라 마라톤 225km 대회를 창설 운영, 급기야 세계 울트라 마라토너 연맹의 아시아, 오세아니아 수장이 되어 국제 스포츠 외교에 당당하게 입성,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위상에 조약돌 한 개를 올려놓기도 했다. 불같은 정열로 앞만 보고 숨이 가쁘게 달려온 지난 날들이다.

 

그러나 세계기구의 임원이 되어 그 자리에 설 때마다 무언가 허전하고 빈 것 같음을 느꼈다. 내 고향 전주,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무지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정체성, 내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모자라니 부끄러웠다. 그래서 망육에 이르러 찾은 게 자랑스러운 내 고향, 소리의 본향 전주, 우리 가락 풍물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장구의 궁채와 열채를 두드렸다. 세계 어느 구석을 가든 장구를 들고 다녔다. 빨강, 파랑, 노랑 삼색띠를 어깨에 두르고 머리엔 상모를 쓰고 서툰 몸짓으로 내 인생을, 너무나도 자랑스런 내 민족, 대 한국인을 노래했다. 내 고향 논두렁, 밭두렁에서 저절로 먹고 마시며 자란 천금 같은 자양분 풍물, 오메! 그게 그동안 내 핏속에서 용케도 살아있었다니. 나라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게 해주는 내 자신의 버팀목 풍물로써 나는 더 당당하고 더 뿌듯해져 갔다. 무대가 스페인의 대로변 알 시멘트 바닥이든, 강남의 카펫 깔린 호텔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베로나 줄리엣 생가도 좋았고 해남의 땅끝마을도 좋았다. 공연 전에 나는 말하곤 한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내 고향은 소리의 본향 전주입니다. 나를 길러준 내 모교는 전주고등학교입니다. 저의 이 흥, 이 몸짓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레 내가 태어나 자란 만경벌 고향의 내음이 진해졌다. 인생의 2막을 위해 주저없이 귀촌을 결심했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뛰어서는 6시간 거리의 양평골에 터를 잡았다.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농가 주택이지만 난 그 안에 나와 아내가 꿈꾸던 것을 담고 싶었다. 커튼의 색깔부터 창틀과 대문의 모양, 텃밭의 작물, 울타리의 수종도 우리가 골랐다. 소나무 바람에 옷고름이 날리고라는 긴 이름의 통나무 별채, 사계를 알려주는 화단의 꽃들, 장독 항아리의 둔부를 희롱하고 지나가는 미풍, 비스듬히 누워 빨래를 기다리는 바지랑대, 나와 아내는 매일 매일 펜 없는 시인이 되어갔다. 그런 우리 집을 작은 악장 소나티네 음악이 흐르는 집이라는 긴 이름의 택호도 지었다. La Casa delle Sonatine.

 

그러나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자그마한 손가락 상처에도 골절인 듯 아파하고, 얕은 어둠에도 호랑이 발톱과 같은 무서움을 느낀다. 그런 나이기에 더 이상의 도전을 멈춘 현재에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한 게 반드시 상위에 자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약하고 부드럽고 조금은 낮게 서 있는 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 고향 만경벌 드넓은 평야에서 보고 자란 아름다운 해돋이, 마을의 굴뚝 사이로 넘어가는 황홀한 석양이 밥 짓는 연기 뒤에서 보여준 붉은 수줍음, 이런 것들은 내 유소년 시절 심성의 밑거름 되어 지금껏 나를 지배해왔다. 조금은 부드럽게. 낮지만 기품 있게. 모자라지만 채워진 마음의 여유로. 그래서 나는 화려한 도시보다 지금의 귀촌 생활을 더 즐기나 보다.

 

, 열 번을 둘러보아도 한없이 부족한 나지만 오늘 후배 재학생 여러분들에게 가만히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삶이 팍팍하고 앞이 안 보이는가요? 삶은 그 팍팍함을 달달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팍팍하면 팍팍할수록 여러분이 만든 달달함은 더 진하답니다. 올리브 씨는 으깨면 으깰수록 더 진국이 나오고요. 없다고 울지 말아요. 모자란다고 투덜대지 말아요. 안된다고 주저앉지 말아요. 초장거리 100km 울트라 마라톤에서, 한 걸음도 더 못 나가고 죽을 것 같아 포기의 뱀 혀가 날름거리는 80km 지점부터가 진짜로 참 울트라 단맛이 시작되는 지점이듯, 한계라고 여기는 그곳이 곧 단물이 나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제일 힘든 곳, 바로 그곳을 인생에 있어서 제일 값진 순간으로 만들어 보세요. 죽기 살기로 매달려 보세요. 그렇다고 죽지는 않아요. 아직 그렇게까지는 안 해봤잖아요.

 

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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