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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할아버지 등록일 2018.11.02 10:56
글쓴이 박복진 조회 1124





할아버지 

시골 내 처소에 놀러온 여섯 살 손녀가 세 번째로 날 불렀다. 내실의 침대에 무릎으로 기어올라 동쪽 창문을 열고 서서 창틀을 잡고 나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잔디 마당 건너편에 있는 통나무집 별채에서 아침 식사 전에 다른 일로 바삐 움직이던 나는 손녀의 몇 번 반복된 부름에도 건성으로 대답 하고 계속해서 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녀가 붕어처럼 자기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위 아래로 길게 만들더니 손나발을 만들어 그 위에 대고 다시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네 음절을 스타카토로 끊어서 목청껏 불렀다. ‘ 할, 아, 버, 지 !! ’ 나는 손녀의 부름에 다시 메마른 대답을 했다. ‘그래, 시우야, 잠깐만!’. 연이은 세 번의 독촉이 있었음으로 이제는 정말로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아내는 텃밭의 싱싱한 푸성귀로 차린 멋진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주말이라 이곳 시골 내 처소에 놀러온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가 아침 식탁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은 일을 조금만 더 해서 마무리하고 싶어 금방 일손을 못 놓았다. 그러자 손녀가 다시 손나발을 만들어 나를 향해 더 크게, 감은 두 눈 위 눈썹에 왕주름이 잡히도록 힘을 주며, 작고 앙증맞은 입을 최대한 벌려 나를 다시 불렀다. 1.4 후퇴 때 흥남 부두를 떠나가는 피난선 함상에서 가족을 부르는 금순이의 외침처럼 처절할 정도로 크게 나를 불렀다. ‘ 할, 아, 버, 지!’ 그리고 나머지 본론도 다시 반복해서 음절 하나, 하나를 끊어가며 불렀다. ‘식, 사, 하, 세, 요!’. 마지막 외침 ‘요’는 메아리 흉내를 내어 ‘ 요, 요, 요, 요...’ 라고 속도를 점점 느리게, 점점 수그러들게 길게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일손을 놓았다. 그리고 손녀의 부름에 답하며 손을 바지에 툴툴 털고 안채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시우야, 할아버지 지금 들어갈게! 밥 먹자!’. 나는 손녀의 할아버지라는 부름에 굴복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손녀의 할아버지라는 부름에 다음으로 미뤄졌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름도 모르고, 사진조차 본적이 없어 얼굴도 모른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할아버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으셨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한참 나중에 장성해서야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라는 단어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전에 등재된 죽은 단어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글들, 내가 본 영화에서의 할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는 이 세상 절반과도 맞먹는 무게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는 하얀 수염, 거기까지 도달하는 인생 역정을 살아나온 지혜 자체가 저절로 우러러 보이는, 저 높은 산의 꼭대기 그 자체였다. 내 손녀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위엄과 절대 존엄의 단어 할아버지라는 칭호로 나를 불러주었다. 아무런 검증도 없이, 아무런 보상 기대도 없이 그냥 무상으로 주었다. 그러니 나는 우리 손녀가 그냥 너무 너무 좋다. 너무라는 단어가 원래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라지만 나는 상관이 없다. 엄청 좋다, 라는 표현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그냥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곱하기 몇 백으로 좋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값진 그 무엇 하나를 빼앗긴다 하더라도 나는 6살 내 손녀가 날 부르는 할아버지라는 칭호를 양보하기 싫다. 

나에게서 풍기는 할아버지의 인상이 내 손녀에게도 나처럼 그렇게 똑같게 느껴질지는 모르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렇게 되도록 지금부터라도 더 노력해야겠다. 통나무집 별채 다락으로 올라가 적어도 반나절동안 책을 읽어주어야겠다. 거실 창틀 위에 놓인, 영국의 시골 골동품점에서 사온 어느 귀족의 전원별장 소품으로 그 안에 살고 있는 왕자님 이야기를 만들어주어야겠다. 9년을 키워 수형이 잘 잡힌 마당의 단풍나무 그늘아래 그네를 밀어주며 도레미송을 들려줘야겠다. 무엇보다도 손녀가 말을 하면 즉각 무릎을 구부려 손녀의 눈높이로 그 말을 끝까지 경청하겠다. 그것이 유치원 샘마을반 자기 짝꿍의 양말색 이야기든지, 자기가 사는 아파트 현관에 붙은 색칠 스티커가 되든지 모두 모두 받아주어 잘 경청하고 호응해주겠다. 손녀 그리고 할아버지, 나는 대본을 받아든 신인 영화배우처럼, 그것이 익숙치 않아 어색하더라도 나는 나의 여섯 살 손녀에게는 일생일대 불후의 연기를 펼쳐보여야겠다. 그래, 아가야, 어서 들어가 아침을 먹자!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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