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3월 글 )
아, 제주여! 제주여 !(1) 안녕하십니까.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입니다 약 30 여 년 전, 나는 내가 그 때까지 살면서 겪은 시간 중 가장 혹독한 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현역으로 소집되어 지방 향토사단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서의 첫 날 밤, 취침 직전이었습니다. 군대가서 군복 단추 떨어지면 뒈지게 맞는다더라, 바늘도 골고루 가져가거라! 군대 가면 세수하고 얼굴 딲는 수건도 안 준다더라, 수건도 골고루 가져가거라! 해서 시골 이모가 정성스럽게 싸준 대침, 중침, 소침 바늘쌈하고 송월타올 왕수건, 얼굴 수건, 손수건은 그 보따리를 풀어보지도 못하고 정문 위병소 헌병 에게 벌건 대낮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몽땅 빼앗기고, 소집 시간에 늦을세라 새벽 밥 먹고 첫 버스를 타고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나는 훈련소 정문 헌병이 던져주는 싸리비로 정문 입구에서부터 위병소 주위를 뺑 돌아가며 한 시간여 얼떨결에 원치 않는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빗질이 시원치 않다고 가끔씩 대가리 박어! 로 위병소 그 헌병의 심심풀이 노리개 노릇을 해가면서... 그 때 나는 나의 신체 부위 중에서 내 대가리 정수리 부위가 제일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대가리 박어! 명령만 나오면 하늘이 노래져, 그 기합만 말고는 다른 어떤 기합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대한민국 군대에는 내가 원하는 기합 만을 골라서 주는 그런 친절은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참 뒤에 깨달았지만, 나는 분위기가, 조금 있으면 대가리 박어! 기합이 떨어질 것 같으면 주위를 돌아보아 말랑말랑한 흙을 긁어모아 잽싸게 훈련복 바지 주머니에 가득 담아 대기하고 있다가, 대가리 박어, 실시! 구령이 떨어지면 주머니의 흙을 꺼내 내 대가리 정수리 닿는 부위에 소복하게 쌓아놓고 그 위에 대가리를 가져다 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지만, 이 186 대가리 같은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요령을 피워? 으엉?? 라는 발악과도 같은 소리를 조교로부터 듣는 순간 모든 것은 다 끝났지요. 내 주머니를 뒤져 마른 흙이 있는지 확인 당하고는 내 정수리에서 베개 역할을 해야 할 게 내 입 아구리 속으로 쳐 넣어 들어갔지요. 나는 내 정수리를 땅에 대고 대가리를 박는 기합이 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웠고, 군대에서의 그 기합의 고통은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정말로 몸서리 쳐지는 기합이었고 두 번 다시는 그 근처에도 가기 싫은 소름 끼치는 내 신체의 고통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담도 내 인격이 사그리 망가지는 그 상황이 견디기 어려웠었습 니다. 그러한 살벌한 고통의 훈련소 입소 첫 하루가 지나가기 전, 나는 두 번째 육체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낮에 향도( 소대의 리더 ) 할 사람 자원해서 나오라고 하는 명령에, 아무도 나가는 사람이 없어 또 대가리 박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향도를 나가면 시범 케이스로 뒈지게 맞는다는 사실을 아는 훈련병인지라 아무도 나가지 않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남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이 없는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다 하며, 향도가 나올 때 까지 전 소대원 대가리 박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환장하게도 훈련소 입소 후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몇 십번을 대가리 박어! 에 시달렸는지 나는 정말 죽기 일보 직전이었지요. 정수리가 제일 약하고, 의지력이 제일 형편없었던 나는 대가리 박어! 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앞으로 걸어나가 원치 않았던 향도를 자청했습니다. 그리고 , 그 날 저녁, 그 날 낮에 외출 나갔다가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훈련소 고참 기간병 병장은 이제 막 취침나팔 소리로 자리에 눕기 시작하는 소대 내무반에 눈알이 시뻘건 저승사자 같은 얼 굴을 하고 들어오더니 소대원 전원 기상! 이라는 깨진 꽹과리같은 고함을 지르며 우리 훈련병들을 침상 일선에 정렬, 다시 삼선에 정렬, 오선에 정렬 등을 정신 못차리게 반복 시키더니, 이 소대 내무반 향도 나왓! 이라는 귀신도 벌벌 떨 것 같은 명령을 내리고 군화를 신은 채 침상 위로 뛰어 올라가더니 관물대 위에 꽂혀 있던 야전 곡괭이를 집어 들어 불문곡직하고 나를 패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라고요? 딱 한 마디. 이 186 같은 놈들 오늘 다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범 케이스로 향도 너부터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참 병장의 미쳐 날뛰는 야전 곡괭이에 나는 순종도, 저항도, 방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그저 내 몸을 그 곡괭이 앞에 내놓았습니다. 낮에 물로 대청소를 한 시멘트 바닥의 물이 아직도 흥건하게 괴어있는 싸늘한 내무반 바닥에 내 몸은 가을날 작대기에 털리는 마른 들깨 다발처럼 이리저리 굴려지며 무자비하니 곡괭이 소나기를 온 몸에 맞고 있었습니다. 뼈가 아스러지고 턱 조각이 덜렁대며 군화발에 박이 터져 바닥에 떨어진 선홍색 피는 불가사리 같은 모습으로 여기 저기 뚝! 뚝! 내 주위를 붉게 물들 였고, 그 위를 북북 기며 짐승같은 신음 소리를 내던 내 몸뚱이 위에 그 곡괭이 광란의 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없었고 내 몸뚱이만 있었습니다. 달!달!달! 돌아가는 탈곡기 위에 얹혀진 체중 68 킬로그램의 살점 덩어리였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은커녕 생각한다는 기능조차도 깡그리 박탈된 상태, 내 생애 최악의 상황이었고, 지금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찍고 있었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내가 기억해 내는, 내 몸이 기억하는, 신체적 정신적 최악의 상태이었습 니다. 3 월 초, 아직 봄은 오지 않아 싸늘한 밤공기가 내무반의 허름한 창문을 통해 스멀스멀 밀고 들어오던 그날 밤 그 광란의 그 곡괭이 춤, 내가 죽기 전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군 입대 첫 날의 지옥문에 발 하나를 들어놓았던 그 추억, 그것과 버금가는 내 육체의 고통 그 한가운데에 나는 지금 다시 서 있습니다. ...... 계속됩니다 아, 제주여! 제주여 !(2) 안녕하십니까. 서울 고덕 달림이 박복진입니다 여기는 제주 울트라 마라톤 200 km 제주 순환 코스 중 약 160 km 지점, 시각은 새벽 2 시 조금 넘긴 시각이고 지금까지 달린 시간은 약 22 시간, 만일 제한 시간 내에 들어간다는 가정을 한다면 나는 지금부터서도 14 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는 상상조차 안 되는 상황입니다. 내 주변은 전방 해안에서 불어재끼는, 달리는 차량을 들썩일 정도의 강풍과 무지막지 하게 쏟아지는 눈보라와 해안 사구를 하루 밤 사이에 이리 저리 옮겨 놓을 정도의 강력한 모래폭풍이오, 민가가 없으니 인적이 있을 리 없는 황량한 들판과 그나마 위안을 주던 가느다란 외줄 전봇대 가로등은 강풍에 죄다 정전되어 칠흑 같은 어둠이 오, 이미 시야 확보가 어려운 바닷물 염분끼로 뒤덮인 안경알 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모래 알갱이와 눈보라는 마치 이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막 내림 직전의 광란과도 같았습니다. 생애 첫 도전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초반 100km 를 먼저 땡겨 놓고 나머지 100 km를 여유 있게 가려고 했던 계획은 무자비한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초반 100 km 의 역주는 오히려 후반 100 km 에 혹독한 시련을 안겨 주었습니다. 내 신발 싸이즈보다 무려 15 mm를 더 늘려 신었는데도 퉁퉁 부은 발은 운동화 실밥을 터트릴 정도의 위협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 극심한 고통, 터져 나 오는 비명 그 자체이었습니다. 나를 강타하는 눈보라와 덮쳐오는 모래 알갱이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둠의 두려움도, 삐끗하면 방파제 너머로 쏠려 갈 것 같은 위태위태함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 이 다리로는 보행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두려움, 그래서 중도 포기를 강요당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 습니다. 본격적인 대회 준비에 들어갔던 지난 겨울, 얼마나 많은 날에 서울의 엄동혹한을 뚫고 캄캄한 한강변을 달리며 200 km 완주의 비수를 갈았던가? 얼마나 많은 날, 이 무모한 도전에 나의 이성을 갖다 들이대며 결행을 묻고 또 물었던가? 얼마나 많은 밤, 오색 풍선 아치 화려한 완주선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며 골인하는 장면의 꿈을 꾸어 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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