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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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어떤 인연 등록일 2016.09.30 05:21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64




어떤 인연


 내가 마라톤에 도전해 보겠다고 홀로 작심한 그날 이후, 나만의 고독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어쩐지 낙오가 먼저 생각되고 화려한 완주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라톤 전 구간, 생애 최초의 도전을 불과 열흘 정도 남겨놓은 어느 날, 해외 출장 중에 홍콩에 기착하여 삼일을 보내게 되었는데 머릿속은 온통 다음 일요일의 나의 첫 마라톤 도전으로 가득했다. 그 날도 아침 일찍 호텔 로비를 빠져 나와 홍콩만으로 나가 바닷가를 따라 꾸며놓은 달리기 길을 달렸다. 백만 불짜리 야경이라고 칭송하는 홍콩만의 야경이 꺼지고 난 이른 새벽, 간밤의 황홀이나 환락과는 거리가 먼 고단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희뿌연 바닷가, 비릿한 내음만이 내 주위를 에워싸고, 달리는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 때, 아까부터 나와 같은 달리기 복장으로, 맞은 편 방향에서 오며가며 나에게 눈웃음을 선사해 주는, 나와 같은 홍콩만 부둣가 거리를 달리고 있는 키가 장대만한 코쟁이가 한 명 있었다. 오며가며 몇 번의 스침으로 약간의 호의가 서로 간에 전달되었으나,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나 특유의 무관심으로 그냥 지나치기만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느껴가고 있었다. 그 키 큰 코쟁이의 웃옷에 찍혀 있는 보스톤 마라톤 상표가 나의 혼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 생애 최초의 마라톤, 그것도 겁 없이 처음부터 전 구간 도전을 일주일여 남겨놓은 마라톤 햇병아리 앞에 유유자적 숨소리 하나 없이 성큼성큼 뛰어가는 저 장대 코쟁이의 당당한 모습. 적어도 나에게 그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나의 유일무이한 현실적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보스톤 마라톤을 뛴 사람! 나는 모른다고 무관심으로 지나치기만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달리기가 거의 끝나간 듯, 건너편 홍콩섬을 보며 몸을 풀고 있는 그 코쟁이에게 다가가 수줍은 첫 인사를 하자 그 코쟁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인사에 화답했다. 대한민국 신사로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몇 가지의 정중한 첫 만남의 의식을 끝내고 그에게,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을,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주 심각했었던 나의 최대의 의문인 질문을 했다. " 외람되오나, 달리기 전에, 그리고 달리는 도중에 물은 꼭 먹어야 되는가요? 내 상식으로는 물을 먹으면 배가 출렁거려 중도 포기해야 된다 하던데요? ". 그 코쟁이는 자기의 시계를 보면서, 그런 모습을 보며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며 물과 마라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미국 남부 켄터키에 살고 있는 그는 마라톤을 아주 좋아하는 코쟁이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홍콩만 부둣가, 이른 아침 마라톤 연습 중에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들 서로간의 전자 서신이 마라톤이라는 공통 화제를 날개삼아 지금껏 태평양을 넘어오고, 또 넘어 갔다. 이듬해 나와 나의 아내는 아틀랜타 여행 중에 그곳 현지에서 이 분을 다시 만났다. 재회의 기쁨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의 생가로 가는 복숭아 길 (Peach Street) 을 같이 달린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멋진 추억이다.

 

   그 코쟁이와의 인연이 나를 구해 주었다. 올 봄 동아 마라톤 도전에서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보스톤 마라톤 참가 자격을 따서 보스톤 마라톤 참가 신청서를 발송했다. 접수 유무가 궁금하던 끝에 날아온 대회 조직위원회 명의의 전자 서신에 의하면, 내 신청서에 문제가 있어 접수가 보류되어 있는데, 이유는 신용카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입력이 안 되어 참가비 인출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찰 접수는 규정상 안 된다 했다. 카드 발급 본사를 접촉해서 이상이 없다는 통보를 받아 내고, 그 사본을 다시 보내고 그리고 또 며칠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님다 바이러스 때문에 보스톤 마라톤 육상연맹의 컴퓨터가 작동을 멈췄다는 이유로 또 며칠이 지나갔다. 접수 보류라니. 내 생애 최고의 도전이 물거품이라니.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현장 접수도 생각하며 하루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가던 어느 날, 그러한 내 사정이 전자 서신으로 그 장대 코쟁이에게 날아갔다. 그러자, 사귄지 삼 년째인 나의 친구 그 장대 코쟁이의 전자 서신이 번개같이, 미국식 표현으로 심장 박동 한 번 뛰는 동안 날아 왔다. "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즉시 대신 납부 하였습니다. 전혀 서둘 일이 아닙니다, 그 금액은 나에게 천천이 부치면 됩니다. 방금, 보스톤 마라톤 참가 신청 해당 부서의 책임자인 Ms. Sweeney 와 통화해 보니, 참가가 확정되어 정식 통보가 간다합니다. 켄터키의 친구 Bill Reed로부터. 그리고 이튿날, 보스턴 육상연맹으로부터 다음의 전자 서신이 도착되었다.

 

   친애하는 박복진님, 귀하는 보스톤 육상연맹이 주최하는 제 106회 보스톤 마라톤 참가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귀하의 이름은 우리의 웹. 사이트 참가자란에 등록 되었습니다. 더불어서, 금일 귀하에게 참가 확인 엽서가 별도 발송되었습니다. 그동안 이해해 주시고 참아 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더, 보스톤 육상연맹을 대신하여 그동안의 불편 하셨던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우리는 귀하를 2002415일에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 만나 뵙기를 고대 하겠습니다. 달리기 연습에 행운이 같이 하시길 빕니다.

 

Denise Sweeney

Manager of Registration Processing

Boston Athletic Association

 

   모르는 사람과의 하찮은 인연이 이렇듯 소중할 줄 몰랐다. 나는 컴퓨터 자판 넘어 창문으로 보이는 허공을 향해 가만히 혼잣말을 했다. 나와 만나고 나와 대화하는 지구상의 모든 분들에게 말했다. 저에게 여러분은 정말 소중하며, 저 또한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도록 일심으로 노력할 것을 맹약합니다!

 

춘포

박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