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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이렇게 아침을 연다 등록일 2016.09.30 04:42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00



이렇게 아침을 연다

 

   하도 진부해서 다시 쓰기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말하길, 마라톤은 고독한 운동이라고 한다.

나는 그것을 이렇게 고쳐 부르고 싶다. 마라톤 훈련은 고독한 운동이라고. 참가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막상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는 고독 속에 빠지고 싶어도 주위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소속 클럽의 동호인들이

들고 나온 요란한 현수막 아래에 현장 기록 보존용 장구로 중무장한 가족, 친지들이 주자들을 붙들어 세워놓고

사진들을 찍어대고, SNS 로 실시간 전송하며, 출발선상에서는 질서유지를 위해 고성능 마이크가 떠들어대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특별 초청이름으로 무슨, 무슨 가수가 나와 노래를 하고, 무슨 배짱인지 정치인도 나와 한

 마디해서 배알을 뒤틀리게 만든다.

 

  간신히 출발을 하고 주로로 뛰어 나가면, 주로변의 응원으로 시선을 뺏기고 경우에 따라선 기록에 신경이

쓰여 차고 있는 GPS 시계의 초침, 분침 액정화면을 여러 번 바라보게 된다. 마라톤의 참맛, 고요함 속에서의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은 그저 구두선일 뿐이다.

 

   대신, 아무로부터의 방해가 없는 평소의 새벽 이른 시각 나 혼자만의 마라톤 연습시간이 진정 마라톤의

참맛이다. 주섬주섬 달리기 옷가지를 챙겨서 입고 집을 나선다. 간밤의 짙은 어둠은 그 기다란 치마 말기를

돌려 감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남한강 새벽은 수묵화의 여백처럼 미명 속에서 눈을 비비는 중이다. 방금

명명식을 끝낸 거함이 드라이 도크에서 바닷물로 스르르 미끄러지며 첫 진수하듯, 나도 가만 가만 마라톤

연습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상큼한 새벽 공기는 콧속으로 노크 없이 제집처럼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귀에 익숙한 새소리는 여기저기에서 나와 새 아침을 반기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어떤 밤이슬은 너무 반가워

나무위에서 나에게 악수를 청하다가 그만 내 볼 위 낙하로 주체 못하는 애정을 표하기도 한다.

 

  돌아앉았던 이름 모를 들꽃은 턱을 고이고 해를 기다리다가, 끝에 맺힌 이슬이 뛰는 내 발걸음 진동에

떨어질라 나름 조바심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럴 때 쯤 나는 바람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양쪽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음률을 듣기 시작한다. 막 목욕을 끝낸 돐 아이의 비누냄새 같은 게 섞인

상큼함이다. , 이 소리. 바람의 소리. 방해 받지 않고 새벽 어스름에 나 홀로 듣는 이 소리. 달리는 내 귀,

귓바퀴에 뱅그르르 날아 들어와 몇 바퀴 돌고 다시 제 갈길 가며 스스로 빚어내는 이 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오랜만에 합방한 여인의 감청이 묻어온 것 같기도 하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저절로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한다. 나는 점점 침잠해져간다. 이제 소리도 없다. 수영장 바닥 물속에 거의 다 내려가 정지 상태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의 흘러내리는 땀이 등을 적시기 시작한다. 앞가슴도 적시고 이마도 적시고 양 볼을 흐르다 떨어지기도 한다.

 안경 두 알 위에 달라붙은 땀방울은 양팔 놀림에 중심을 잃어 서툰 발레 몸짓으로 요리조리 이동하며 뿌예진

시야를 더더욱 흐려지게 하는데, 이 때쯤 나는 남미 안데스, 페루 음악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내가 처음 듣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는 루미루나 RUMI RUNA를 듣는다. 우리나라의 단소처럼 생긴 악기가 빚어내는 께나의

초반 도입부 독주가 듣는 이를 황홀경으로 몰고 가는 엘 콘도 파사 EL CONDOR PASA를 듣고, 기억이 확실

하다면, 매년 2월에 4,000M 고산지대에서 아래 저지대로 돈 벌러 내려가며 집 떠날 때 헤어지는 가족과 함께

남자들이 부른다는 무야슈카 MUYASHKA의 단조롭게 반복되는 멜로디도 듣는다남이 들으면 우스워 할지

모르지만 나는 매일 아침 나만의 고독한 마라톤 연습 중에 자연스레 떠올리는 남미 안데스 산맥 에쿠아도루

음악에 스르르 안기곤 한다나 혼자만의 마라톤이 주는 고독의 날개 짓 속에서 내 영혼이 느끼는 가장 편안한

자연의 소리, 그것과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것 중 하나인 안데스 음악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께나, 싼뽀니아,

차랑고, 봄보 그리고 기타이렇게 다섯이서 빚어내는 무공해 자연의 음악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고독한 홀로

마라톤 연습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무아의 지경으로 가는 승차권이기 때문이다.

 

   달린 거리가 길어지며 빠른 템포의 이 음악이 어느 정도 내 가슴을 적셨을 즈음, 내 가슴은 이제 자연스레

우리 풍물가락 속으로 잠입한다. 부드러운 앞산의 능선. 아무것과도 부딪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 선을 유지

하는 나무들의 허공 향한 뻗음들. 서두름 없이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 강물. 그 위에 그림 그리며 지나가는

물새들이것들이 한데 얼려 죄다 만들어내는 우리 풍물장단이 내 머릿속에 솔솔 피어난다. 힘이 들어서

달리기가  느려지면 느려져서 더 잘 맞는 기가 막히는 굿거리장단이 기다리고 있다. 이 땅의 선조들이 지게

작대기로 지게 다리 두드리며 저절로 읇조렸을 이 가락들이, 예전에 누구를 통해 책으로 배우지 않았던 이

가락들이 긴 세월동안 내 가슴 속에서 여태 살아 있다가 어찌 되살아나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굿거리 흥에

저절로 얼씨구! 를 내뱉으며 허리에서 물병을 찾아 한 모금을 한다. 고독한 마라톤 연습에서 깨어나 오늘 하루

보내야 할 현실 세계로의 회귀를 위해 차가운 물 한 모금을 한다. 고독한 마라톤 연습이 가져다 준 달달함이

묻어있는 입술을 혀로 한 번 더 핥으며 나는 이렇게 나의 아침을 연다.

 

춘포

박복진

( faab  마라톤화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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