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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내 멋에 삽니다 등록일 2016.09.30 04:33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50

 

 

 

내 멋에 삽니다.

 

   여러 가지 현란한 그림이나 글씨가 들어가 있는 티셔츠가 우리나라에 막 소개되기 시작했던

오래된 그 시절, 나는 이 티셔츠가 정말 갖고 싶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유행하던 장발에,

우수에 젖은 듯한 흑백으로만 인쇄된 반항적인 대중 음악가들의 그림이 인쇄된 티셔츠는

정말 갖고 싶었습니다. 지금이야 별것 아니지만 그 당시 그 그림의 주인공들은 완전한 나의

우상으로 내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에릭 크랩톤, 폴 사이먼, 아트 가펑클, 롤링

스톤즈, 그룹 캔사스, 존 레논 등, .

 

   이들의 음악은 젊은 나의 피를 홀라당 헤집어 놓았으며 어쩌다 구해보는 외국 잡지

에서의 그들의 활동이나, 신변잡기 같은 것들은 성경 구절만큼이나 값진 나의 지식이었

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이나, 노래가사, 노래 제목들이 인쇄된 티셔츠는 정말이지

너무 너무 입고 싶어 안달이 났었지만, 그 당시 이런 티셔츠들은 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파는 곳을 알았다 하더라도 값이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버스

값도 없어서 버스를 갈아타는 법이 없었을 때이었으니까요. 서울 시내 어디를 가던

한 번은 할 수 없이 타지만 그 다음 나머지 거리는 걸어서 다녔지요.

 

   궁리 끝에 나는 그냥 하얀 메리야스를 사서, 문방구에서 산 수성 펜으로 내가 직접 글씨도

써넣었고 그림도 대충 그려서 입고 다녔습니다. 생각 해 보십시오. 하얀 면 메리야스에

매직펜으로 가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약간 타원형으로 길게 늘려서 쓴

 " BRIDGE OVER TROUBLED WATER " . 그리고 그 티셔츠를 입고 히히덕거리며 명동 바닥을

 누비고 다녔던 이 촌닭을. 돈이 없어 인쇄된 정품을 못 사고 내가 직접 쓴 짝퉁을 입고 다녔던

이 어설픈 반항아를나는 내 멋에 살았습니다.

 

   한동안은 또 존 웨인의 서부 영화에 완전히 미쳐버려서 자나 깨나 존 웨인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존 웨인이 입었던 소매 끝과 바지 끝이 너덜너덜하게 술이 달린

그 옷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옷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었고 미국

서부 애리조나에나 가면 있을지 모르나 그 당시 내가 어떻게 미국 그곳을 가며, 내가 어떻게

그 비싼 옷을 산단 말입니까

 

  그래도 포기를 안 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다니니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꽤 잘 사는

집이나,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하는 집에 재봉틀이 있었는데, 그 비싼 재산 목록 일호인 재봉틀은

사용하지 않을 때 빨간 벨벳 천으로 덮어놓는 게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빨간 비로드 천

 가장자리에는 노란 술이 너덜너덜 달린,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교 교기나 커다란 총동창회 깃발

가장자리에 달린 너덜너덜 노란 술입니다. 바로 그거지요.

 

   나는 형님 집에 있던 아이디알 재봉기 덮는 천, 그 끝에 달린 너덜너덜한 술을 몰래 가위로 잘라서

내 웃옷 소매 끝에 달고 바지 옆선과 가랑이 끝에도 달았습니다. 마치 소치는 미국 서부 목장의 한

목동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서울 바닥을 쏘다녔습니다. 돈이 없어 버스도 못 타고 걸어 다녔지만

이 노란 술 달린 옷을 입은 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쏘다녔습니다. 나는

내 멋에 살았습니다.

 

   이곳 양평으로 이사 와서는 나만의 마라톤 코스를 개발해 놓고,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장거리

새벽 뜀질을 즐깁니다. 고추하고 가지, 호박이 서로 뒤엉기어 나뒹구는 텃밭 옆 대문을 지나고,

백로 다섯 마리가 사는 밤나무 단지도 지나고, 졸졸졸 냇가를 첨벙거리며 건너서, 꽤 심한 경사도가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임도를 올라가다보면 어느 사이 시원한 솔 내음, 솔바람.. 부지런한 마을 농부

새벽부터 논두렁 풀 베는 예초기 소리 가늘어질 즈음 내 눈앞에 나타나는 황금정원 전원마을,

달빛이 머무는 집이라고 송판을 불로 지져 매달아 놓은 작고 예쁜 동화 속 집. 그리고 남한강물이

벽에 부딪쳐 깎아놓은 절벽에 이르러서는 허리에 찬 물병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왔던 길 다시 돌아갑니다.

 

   오늘 아침, 정신없이 이 길을 뛰다가 자갈 길 가장자리 풀 섶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제법 큰 날 짐승의 깃털이었습니다. ! 이건 하늘을 나는 남미 안데스 산맥, 바위틈에서 사는 콘돌의

깃이런가? 나는 한참동안 이 깃털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동경하는 이 새의 무한자유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가만히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귀 옆댕이 망사구멍에 이 깃을 찔러 끼어봅니다.

다시 모자를 씁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봅니다. 만족한 나는 서서히 뜀질을 다시

가동하여 이 콘돌새의 자유를 내 것으로 품어봅니다. 나는 이제 지상의 미물이 아닙니다. 저 파란 들판을

가로질러 올라간 산, 남미 안데스 7,000 미터 고지의 콘돌 새가 되었습니다. 나는 뛰지 아니하고 납니다

 뜀질이 아니고 이제부터 날개 짓입니다.

 

  이 깃털을 꽂고 한참을 달려 동네 초입을 지나가니 수퍼 앞의 동네 노인 둘이서 나를 바라봅니다.

 나의 이동에 따라 두 노인 고개가 따라오며 나를 바라봅니다. 내 머리, 모자 옆댕이에 꽂힌 깃털을

똥그란 눈으로 바라봅니다. 나의 이 모습이 그 분들에게는 오늘 하루 경로당 이야기 거리이겠으나

나는 지금 아주 진지하며 엄청난 희열에 빠져있습니다. 갔던 길 다시 돌아와 집에서 몸을 씻으며

나는 그 깃털을 아주 소중한 부적인양 샤워 꼭지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아내와의 아침 밥상머리에

돌아와 앉습니다. 나는 다음 주말에도, 다음, 다음 주말에도 여기 이곳 내 집 양평에서 뜀질을 할 때면

 이 콘돌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고서, 냇가를 건너고, 들녘을 가로질러 산을 넘어 강변 절벽 쪽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내 머리, 모자 옆댕이에 오늘 주은 새의 깃털을 꽂고 씽씽 달릴 것입니다.

나는 내 멋에 삽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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