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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용기보다 오기 등록일 2016.09.30 04:31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12




용기보다 오기

 

  드디어 임진각 망배단에 도착했다. 나를 반기는 대한민국 한반도 종단 537km 울트라 마라톤

대회의 조직위원회 임원도, 자원봉사자도, 주자들을 반길 가족이나 지인들 아무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 종단 537km 울트라 마라톤 완주선이라는 아치도 없고, 달려가니 내 가슴에

걸쳐질 오색 완주테이프도 없다. 대회는 이미 두 달이 지난, 지난 7월에 벌써 끝나 있었다.

간밤에 손전등을 들고 뛰어오던 서울-문산 통일로 국도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추웠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 다시 뛰기 시작해서 지나온 추풍령의 고독보다는 덜 했다. 영동,

옥천을 지나며 찾아온 허기에 길가 가로수 대추나무에 달린 퍼런 대추 몇 개를 허겁지겁 따

먹으며 느꼈던 비애보다도 못했다. 잔인할 정도로 직선화된 청주-광혜원 구간에서 미처 준비

못한 식수 때문에 말라 들어가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바라보던 달빛의 매정함보다도 못했다.

 

  용인, 의왕, 과천을 거쳐 30여 년 이상을 살아온 서울에 이르러서, 자정이 임박한 그 시각

한강대교를 뛰어서 건너며 바라보던 강 위의 불빛들, 멈춰서는 안 될 바쁜 뜀이었으나 나는

한참을 거기 그렇게 서있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재도전의

용기인가? 뛰다 남은 거리에 대한 오기인가? 아니면 그것도 저것도 아닌 백치의 소치인가?

지친 몸을 뉘일 곳 없고 누가 불러주어 따끈한 커피 한 잔 줄 이 없는 한강대로를 홀로 뛰며

지나갈 때, 깊은 밤 마분지를 찢어 이부자리를 만들고, 남은 소주 한 모금 들이키며 잠을

청하는 서울역 광장 노숙자들을 바라보며 남은 길을 재촉 할 때, 정말이지 지독한 삶의

공허함도 느꼈다.

 

  중도포기 탈락자. 나는 대한민국 한반도 종단, 태종대에서 임진각까지 달리는 537km 울트라

마라톤 도전 실패자였다. 힘이 들어 쉬고 싶을 때, 이만하면 됐다! 라고 자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대회가 끝난 지 언제인데 혼자서 이게 무슨 짓인가? 라고 자문하며

달리기를 다시 접고 싶을 때 나는 이 단어를 끊임없이 주문처럼 외워댔다. 중도포기 탈락자.

나는 어떻게 해서 대회 중단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극심한

수면 부족이 나를 그렇게 내몰았을 것이다. 출발지 태종대에서부터 날 괴롭혀 오던 발목 부상이

악화될지 모른다는 지레 겁먹음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신중

했어야했다. 내 지나온 삶의 고비, 고비에서 나는 좀 더 신중했어야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습관이 그 날도 날 그렇게 쉽게 내몰았을 것이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맨 처음 맛본 중도포기의 상흔은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포기한 나를 두고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추켜 세워주던 동료들의 고마운 거짓말이 정말이지 싫었다. 그래서 모진

마음을 먹고, 대회야 끝났지만 혼자서라도 남은 거리를 다시 뛰기로 작정했다. 그래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래서 중도 포기했던 김천의 220km 지점으로 향하는 야간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며

나는 나 자신을 다그쳤다. 니미럴, 내가 못 할 줄 알고?

 

   그러나 막상 혼자서 하는 달리기가 이틀째 되면서 나는 생각을 다시 바꿔 모질지 않게 살기로

했다. 앞으로도 내 삶에 더 이상 신중을 두지 않기로 했다. 220km 지점 김천역 광장 그 자리,

내가 포기를 선언했던 그 시각, 새벽 3시에 맞춰 남은 거리 317km 임진각을 향해 나 홀로 뜀을

시작할 때 나는 기꺼이 마음을 비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만히 말했다. 이건 용기도 아니고

오기 또한 아니다. 내가 가보고자 했던 대한민국 국토 종단 길, 다 가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한 번 다시 가보아야지! 라는 단순한 마음으로 뜀을 시작했다. 대회가 끝이 났으니 기록도 필요

없고, 당연히 각 주자 확인점에 날 반길 동료들도 없고, 날 향해 박수 한 번 쳐 줄 가족도, 친구도

없고. 그리하니 내 마음은 퍽도 편해졌다. 그야말로 마음을 비운 국토 종단 나머지 길 김천에서

임진각, 나는 진정으로 고독한 달리기를 즐겼다. 그리고 삼일 째 날 지난 토요일, 간밤 내내 날

에워싸고 졸졸 따라오던 농무가 겨우 앞을 열어줄 즈음 대한민국 종단 537km 울트라 마라톤

완주선, 임진각에 들어섰다. 졸음과 허기, 기어코 해낸 후 그 허망함으로 두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계단을 올라 망배단 완주선에 엎드렸다.

 

   망배단을 내려오며 가을걷이가 끝난 문산 임진각의 너른 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여름 이래

그토록 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 하나를 덜어낸 홀가분함이 날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내 삶에서 또 하나의 굵은 획을 그은 오늘 이 순간이 제법 알량한 무게로 나에게 작은

속웃음을 선사해주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기어코 얻어낸 나만의 작은 속웃음, 방식이야 어쨌든

나는 대한민국의 남단 태종대에서 이곳 임진각까지 두 발로 뛰었다. 뛰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조국애를 느끼었고, 뛰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내 신중치 못한 처사에 대한 뼈저린

반성의 시간도 가져보았고, 그리고 또 하나, 내가 겪은 극심한 고통의 나락에서 나는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절대의 겸양을 다짐해보았다. 대한민국 한반도 종단 울트라 마라톤 537km 대회가

시작된 지 91일이 지나서야 홀로 도달한 완주선, 나는 스스로 포기자임을 알리려 굵은 매직으로

X 자를 쳐 넣은 내 배번호 528번을 가슴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서울행 교외선 기차를 기다리려

임진각역 대합실에 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어, 이것이 나의 용기인가, 오기인가 다시 한 번

더 자문해보려 할 때, 서울 행 기차가 들어왔다.

 

 

*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종단 537km 대회는 무박, 무지원 울트라 마라톤 대회로 대한 울트라

마라톤 연맹이 주관하며 매 짝수 해 폭염이 극을 달 할 때인 7월에 거행됩니다. 총거리 537km

에 제한시간은 128 시간입니다. 필자는 그 다음, 다음 대회년도에 재도전해서 125시간 6분 만에

총 완주자 129명 중 16위로 오색 완주테이프를 가슴에 걸치고, 대한민국 울트라 마라톤 명예의

전당에 이름 석 자를 쪼아 넣었습니다. 최종 완주선인 임진각 망배단에는 필자의 가족을 포함,

100 여 명의 동료, 지인들이 도열해서 완주자들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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