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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달림이 우주에 서다 등록일 2016.09.30 05:31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05



달림이 우주에 서다

 

   여기는 뉴질랜드 남섬의 조그만 마을인 트와질 산장, 멕킨지 모텔이다. 정상에 만년설이 웅장한 마운트 쿡

산이 버티고 있다. 이곳 켄터베리 평원은 년중 강우량이 400mm를 넘지 않는 매우 건조한 지대이기 때문에 춘하추동 게절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지형과는 많이 다르다. 미국의 애리조나 주나 멕시코의 메마른 산악지대 같은 끝없는 건조지대. 천지사방 다 둘러봐도 건조지대의 특색인 토종 건조 풀, 터석 ( Tussock ) 뿐이다. 우리를 태운 차가 이곳에 정차하여 하룻밤을 묵어간다고 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내일 새벽 이곳 평원을 뛰어보아야지! 하늘 아래의 끝없는 평원, 일자로 곧게 뻗은, 태고의 정적만을 내 친구로 삼는 이 밤길을 뛰어보아야지!

 

   가운데 두 이빨 사이가 1mm 정도 벌어진, 그렇다고 해서 그걸 단점이라고 감추는 기색은 전혀 없는 호텔

접수대의 아가씨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아니, 이렇게 이른 새벽 3시에 어딜 가시려고요? 라고 물을

태세다. 이 모습에 내가 먼저 말을 해줬다. " 나는 마라톤을 합니다. 어제 여기 마운트 쿡 오다가 본 포카케

호수까지 뛰어갔다 오려고 합니다 ". 그러자 그녀는 " 그곳까지는 뛰어 갔다가오는 그런 거리가 아닙니다. 너무

멀어요. 그리고 밤에 그 도로를 뛰는 것은 안 됩니다. 이 곳은 아침 5시 반 정도 돼야 해가 뜹니다 " 라고

말하며 해 뜨는 쪽을 동도 아니오, 동남도 아닌 북쪽을 가리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Mackenzie

Country Inn 이라고 쓴 모텔 이름 입구를 지나서 본격적인 도로를 향해 뛰어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칠흑같은 어둠 뿐, 지나가는 차량 한 대 없고, 설혹 차량이 온다 해도 지평선 끝 그 차량

불빛을 보고 나서 내 앞에 다가올 때까지는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 같다. 머리의 랜턴을 도로의

중앙선 하얀 실선에 맞추어 비추고 뛰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호신용 칼이 거추장스러워 하얀 면장갑 속에

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오른손에 거머쥐었다. 이렇게 약 2Km 정도 나아갔다고 생각되어지는 순간, 갑자기

무슨 이유인지 뭔지 모를 지독히 차가운 불안감에 나의 뜀질이 서서히 멈춰지기 시작했고, 극심한 공포심으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휘발유가 떨어져서 푸드덕 거리다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뽑아서 태우고 최후에 엔진 숨을 거두는 자동차처럼 서서히 나의 뜀질은 멈추어졌다. 주위는 온통 무시무시한 공포를 수반한 어둠뿐이다. 불안감에 더 이상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섰다. 마치 우주 공간의 한 가운데에 내 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공포심에 숨이 멎을 것 같아, 어둠이 뻗쳐나간 도로의 저 쪽 끝을 노려보았다. 쥐고 있던 호신용 재크 나이프를 다시 고쳐 잡고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며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래도 공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황야를 어슬렁거리는 야생의 맹수 생각 때문이었을까메마른 건초더미에 숨어 있다가 움직이는 물체에 벼락같이 기어 엉겨

붙는 맹독의 방울뱀 생각 때문일까아니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이곳 외국 관광객을 노리는 떼강도 생각

때문일까어이없는 매복 공격을 당해 부하 전체를 잃고 패주하는 장수처럼 허겁지겁 다시 모텔의 불빛이 보이는 지점까지 되돌아 왔다. 어둠이 주는 공포가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다시 모텔 입구 작은 길을 돌면서 정신 재무장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곳의 어둠은 천지창조 이전의 어둠 바로 그 자체이었고, 세속에 길든 나는 그 무서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맹수에 씹힌 나의 사진과 함께

 " 한국 관광객 뉴질랜드에서 새벽 마라톤 중 맹수에게 공격당해. " 라는 타이틀의 국내 조간신문이 자꾸만 연상

되었다. 많이 아쉽고 참담했지만 3시간 여 새벽 달리기 하고자 했던 뜻을 접었다

 

   얼마 후 나는 가만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새벽 다섯 시, 어둠은 걷히질 않았다. 나는 그냥 그대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아침을 맞았다. 한참을 더 지나고, 커튼 사이로 환한 새벽기운이 보이자 아내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끝에 푹 꺼진 밀가루 푸대 자루처럼 걸터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아내가 말했다. " 왜 그러고

있어요? 새벽에 뛴다고 나가는 것 같더니..“ 나는 말했다.바깥이 너무 캄캄하고 무서워서 못 뛰었어. 이렇게

캄캄 절벽은 처음이야.. 어쩜 그렇게 밤이 캄캄할 수가 있지? 저기 저 입구의 라다니아 소나무가 한 그루도 안

보였어. 그리고 무섭기는 또 오그라지게 무서웠어. 맹수도 무섭고, 독충도 무섭고, 뱀도 나올 것 같았고

강도도.. 내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지독한 어둠 속 무서움은 처음이야. "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 얼레? 이 이 보아! 여기 뉴질랜드에는 맹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맹수가 없으니 새나

포유류도 도망 갈 필요가 없어서 비대해 지고. , 그래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날지 못하는 새, 키위가 사는

곳도 이곳이고. 이곳은 화산지대이니 땅속이 뜨겁고 낮과 밤 일교차가 너무 커서 뱀이 못 사는 게

이곳이라잖아요.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래요? 그리고 이곳은 일 년 내내 절도, 강도도 없다쟎아요?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데요? 절대로 안 빼먹는 새벽 마라톤을 못 할 정도로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데요? 뭐가요?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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