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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새벽의 안개 속 리젠트 공원 등록일 2016.09.30 05:26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00




새벽의 안개 속 리젠트 공원                                        

 

   오전까지 일을 하고 오후에 공항에 나가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 옛날 어느 무지무지하게 힘 좋은

장사가 돌팔매질을 해서 생겼다는 영국의 히스로 ( He throws ) 공항에 밤늦게 도착합니다.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 안에서 쭈그리고 시달리다 보면 몸은 절은 배추처럼 처지게 되는데, 나처럼 달리기를 해야 몸과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은 그저 죽을 맛입니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어서 빨리 호텔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소나기 ( 샤워 ) 하고 깨끗한 침대 속에 몸을 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박한 저의 사정과는 아랑곳없이 호텔에 들어가기까지는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입국사열대 앞에 늘어선, 새마을 온돌 난방 파이프처럼 돌고 돌아생긴 긴 줄. 도대체 속도라고는 전혀 없는

입국 수속 공무원의 느려터진 손놀림에 그저 한숨만 나오지요. 언제고 느끼지만 그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그곳 시스템은 잘도 흘러갑니다.

 

   시내로 들어가는 리무진버스를 타면, 늦은 시간이라 버스정류장에 손님이 없는데도 꼬박꼬박 정차합니다.

정지신호는 얄미울 정도로 꼬박꼬박, 또 죽을 맛이지요. 우리나라 심야버스 기사 분 같으면 그냥 내달리면서

주변을 쓰윽 한 번 훑어보고 늦은 시각에는 자의로 무정차 고속통과를 하기 일쑤고, 어쩌다가 졸고 있던 승객

 하나가 깜짝 놀라 내린다고 하면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도로 한 복판에 내려주고는 그냥 내빼는 경우도

있지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좌우지간 또 얼마의 인내심을 지불하고 호텔에 도착해서 접수대 앞에 서면 예약확인을 하거나, 호텔요금

보증을 위해 신용카드로 금액 없이 빈 청구서에 먼저 선 서명을 하는 등, 그 수속의 느릿함에 또 속이 뒤집히며

쌓인 피곤함에 가만히 서있어도 저절로 눈이 감길 지경입니다. 겨우 방 열쇠를 받고, 짐을 들고 뒤따라 들어온

짐꾼에게 동전을 쥐어주면 이제 내 공간, 지친 내 몸을 뉘일 시간입니다만, 내 몸은 고국, 대한민국 시간으로

이미 잠자는 시간을 훨씬 넘긴 아침이 됩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잠자리에 들었지만 두 눈은 말똥말똥, 잠이

십리는 달아나고, 침대에서 뒤척뒤척하다 시계를 보면 새벽 두 시, 고국시계로 치면 벌건 아침이라 잠은 벌써

 달아나버렸지요.

 

   할 수 없어 불을 켜고 달리기 복장을 챙기며 어서 빨리 새벽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어둠도 채 걷히기

전에 호텔복도를 살금살금 내려옵니다. 교대시간만을 기다리며 깜박깜박 졸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밤

근무자에게, Good morning! 이라고 나직하게 속삭이면 토끼처럼 빨간 눈을 한 이 밤 근무자도 Morning!

이라고 대꾸하며 자기 시계를 보곤, 아니 이렇게 일찍? 이라는 몸짓을 쓰며 저를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호텔 앞을 가로질러 불과 몇 백 미터 앞에 있는 공원, 새벽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아직도

캄캄한 리젠트 공원으로 달려 나갑니다. 짙은 안개속의 작달마한 가로등, 그리고 신호등들. 너무 두꺼워

움직일 수도 없어 보이는 안개 속에서 잔가지를 하늘로 펼친 겨울나무들, 어쩌다 마주치는 이 이른 새벽에

개를 데리고 공원에 산책 나온 시민이 끌고 나온 개, 그 개의 목과 등에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안전 발광 띠,

가까운지, 먼지 분간이 안 되는 저 높은 곳에서 나의 방향 등대가 되어주는 브리티시 텔레콤의 송전탑 불빛.

이것들을 신호삼아 나는 안개 짙은 이른 새벽의 리젠트 공원에서 뜀질을 시작합니다. 나이든 늙은 아줌마들의

산책을 위한 내부 순환코스도 돌고, 조깅족들을 위한 공원외곽을 도는 제법 먼 길도 돌고, 잘 손질된 잔디를

밟으며 이리로도 뛰어보고, 저리로도 뛰어보고 첫 눈 오는 날 묶였다가 풀어놓은 강아지 마냥 신이 나서

뜁니다.

 

   어제 새벽 아침, 짙은 안개 속에서 지척이 분간이 안 될 정도의 내 뜀길을 달리며 나는 언제나 영국 런던의

출장 첫 날, 시차적응이 덜된 그 첫날 리젠트 공원에서의 새벽 뜀질을 떠올렸습니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못

이뤄 물먹은 이불솜 같은 내 몸뚱이지만 짙은 안개 속 리젠트 공원을 한바탕 뛰고 돌아와 내 호텔방에서 몸을

 씻고 신발 팔러 코쟁이를 만나러 가곤 했던 그 리젠트 공원. 어제 아침 새벽의 짙은 안개는 나를 그 속에서

뛰고 있는 양, 자꾸만, 자꾸만 나를 그 안개 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