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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백악관 달리기 등록일 2016.09.30 05:25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52






백악관 달리기                                             

 

    오래 전, 15살 때부터 거의 35여 년 동안을 펜으로만 사귀어 오던 소위 말해서 펜팔 여자 친구를 처음으로 만나보러 미국 워싱턴에 갔었다. 목소리 한 번 안 듣고, 얼굴 한 번 안보고 35년 동안 편지로만 우정을 유지해온 소녀다. 군대 갔다 와서 보니 옛날 주소가 몽땅 없어져버려 그 후 10 여 년의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파란 눈 미국 펜팔 소녀 주소만을 가지고 만나러 갔었다.

   공항에 딸 둘과 남편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반기던 그 미국 펜팔 부인. 이미 손녀 딸 하나를 가진 딸 셋, 아들 하나의 50 대 중반 미국 할머니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가지고 갔던, 그 소녀가 나에게 줬던 35년 전의 긴 생머리 미국소녀의 흑백 사진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없어진 소녀의 세월 그 자리에 부러울 정도의 환한 미소가 대신 채워져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출국장을 빠져 나오던 승객 중 동양인은 우리 둘 밖에 없었으니 금방 알아보고 나와 나의 아내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환영객을 바라보던 아내도 직감적으로 말했었다. 저기 저 네 사람 서 있는 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여자들의 직감이란 정말 대단했다.

 

   35년 간 계속되었던 우리들의 편지 우정을 하룻밤 사이에 다 풀 수는 없었지만, 우리 둘은 늦은 밤 호텔 바에서그 동안 편지로 못 다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관객의 입장에서 나의 아내와 그 미국 소녀의 식구들은 진지하게 우리 대화를 경청하며 자리를 같이 해 주었다.참 보기 드문 만남이었고 흔치 않은 자리였다.

 

   늦은 밤 새벽까지 정담을 나누다가 늦게 잠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하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여기 까지 왔는데 내일 새벽 여기 호텔에서 백악관까지 한 번 뛰어가 봐야지. 아직 한국의 달림이들 중 백악관을 뛰어 본 사람이 있을까? 라는 약간의 으시댐도 없지 않았다.

   불과 두 시간도 못되는 토막잠을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근무 중인 접수대 직원에게 시내 지도 한 장을 얻어 형광 볼펜으로 백악관 가는 길을 표시해 달라하고 그걸 접어 손안에 넣고 새벽의 워싱턴을 달리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몇 번 우회전, 좌회전을 해서 이제 백악관으로 가는 펜실베니아 대로에 올라섰다. 생각만큼 백악관은 일반 주거지역에서 멀리에 있지 않았다. 나는 백악관을 바라보는 정문, 도로 앞까지 뛰어와서는 걸음을 멈추고서 가만히 백악관을 바라보았다. 저게, 저것이, 저 안에서 세계를 주무르는 모든 권력이 나온단 말인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그 규모에 나는 조금은 실망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그 소규모의 하얀 집에 대한 우러름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차고 앉아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그들은 세계의 현장에 자기를 대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순찰 경찰차가 걷는 속도보다도 더 느리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일 뿐, 도로 가장 자리

에는 관광 기념엽서, 뱃지를 파는 리어커 행상 하나가 막 보따리를 풀고 있는 모습이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뜀질을 시작해서 담을 따라 백악관 건물 뒤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수 없이 익히 보았던 뜰, 나무, 분수들이 있었다. 이곳이 백악관이라고 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평범한 장소에 있는 평범하니 작은 건물, 심지어 한쪽으로 더 뛰어가니 그곳은 하수구 공사를 하는지 땅을 파헤쳐 놓았고, 위험이라는 작은 팻말 하나 뎅그러니 서 있었다. 도대체 이해가 잘 안 되는 너무 수수한 주변의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뒤돌아서서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오면서는 왔던 길이 헷갈려 몇 번을 골목을 돌고 돌아 겨우 호텔을 찾을 수 있었던, 아주 평범한 외국 출장길 새벽 나의 어느 뜀질이었다. 별나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고, 별나게 크게 위엄도 없었던 백악관 앞에서의 아침 달리기, 그곳은 정말로 평범한 하얀 집 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 안에서 지금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지만 빼놓고 본다면...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