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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달리기 일지, 뉴욕 중앙 공원 등록일 2016.09.30 05:24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19





달리기 일지, 뉴욕 중앙 공원

 

    해외 출장 중에 뉴욕에 들르면 예외 없이 아침 달리기는 뉴욕의 중앙공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맨해튼의

남부에 머물든지, 북부에 머물든지 이곳 중앙 공원으로 가는대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맨해튼은

개발할 당시부터 도로가 바둑판같이 질서정연하게 동서남북으로 쭉쭉 뻗어있어서 앞으로 몇 블럭 ( 현지발음

으로 블락 )을 가서 좌로 몇 블럭, 혹은 뒤로 몇 블럭 가서 우로 몇 블럭, 이런 식으로 가면 혼돈 없이 목적지에

갈 수 있는데, 호텔 접수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내지도 위에 중앙 공원 위치를 확인하고, 블럭 수를

헤아려 길을 따라 달리면 아주 쉽게 그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인도 위를 뛰어가야 하는데, 인도가 우리처럼 오르락내리락, 육교 등이 전혀 없어 뛰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신호가 빨간 불이라 하더라도 이차선 정도의 좁은 길에서는 차량의 운전자가 뛰는 나를 보고 차를

멈추며 먼저 건너라고 손을 들어 양보를 해 줍니다. 우리보다 몇 배나 더 바쁘게 사는 이곳 도시인들의 어느

곳에서 그런 여유가 나오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길 옆 인도를 따라 뛰어서 수 십 블럭을 가도 희한하게 신호에

 걸려 서서 기다리는 경우는 사실 몇 번 없습니다. 이건 교통량에 따라, 차의 이동속도에 따라 움직이는 전자

감응 신호체계 때문입니다. 짧게는 4-5개의 블럭, 신호등 4-5개를 통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차가 신호에 걸려

정지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희한하게도 바로 앞의 빨간 신호등이 차가 접근하면 자동으로 파란 불로 부드럽게

바뀌는 장면은 감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동양의 끝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날라 온 이 달림이가 100년이 넘은 이곳 중앙공원에

이르면, 이렇게 이른 새벽, 나보다 더 부지런한 이곳 뉴요커 달림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느 분은 와서 뛴 지

한참 되었는지 옷이 땀에 흥건하게 젖어있고, 또 어느 분은 정리 운동단계로 들어갔는지 땀을 닦으며 서서히

걷는 모습도 보입니다. 나도 구석에서 몸을 이리 저리 오므리고, 뻗고, 비틀며 준비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중앙 원형을 따라 살살 뛰다가 곧 그네들의 속도에 합류하여 뒤를 따릅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볼 양쪽 가장자리에

미소를 크게 만들며 누구라도, Good morning! 이라는 인사를 나누는 것은 기본이지요.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도시에 사는 도시인이지만 그들은 정말로 친절합니다. 그들이 무섭고, 침침하며 범죄자 같은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한밤중에 총소리, 숨넘어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듣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이곳에 온 이방인으로서 호기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살펴 뛰던 나를

현혹시키는 여성 달림이가 있어, 나에게는 항상 이게 문제가 됩니다. 그 젊은 여성의 탁월하지만 민망한 뜀질

복장이 문제입니다. 우선 그 여성의 색깔을 선택하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같은 회색이지만 연함과 짙음으로

따져 연함 쪽이 78%, 짙음이 22% 정도 고급 비율의 회색이 조합된 멋진 색조입니다. 거기에 감청색이나 검정

등의 촌티 나는 상표 글자가 아니라 아주 진한 하얀색 세련된 디자인으로 된 로고입니다. 여기에 더해 내 넋을

홀라당 빼 갈 정도로 잘 다듬어진 그 여성 달림이의 몸매입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박물관에서 보았던

대리석으로 깎은 것 같은 잘 생긴 외모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근엄하게 처신을 하려해도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시선이 자꾸자꾸 갑니다. 한 번도 거른 것 같지 않은 아주 잘 취한 영양 때문인지 탐스럽게 잘 발육된

신체. 필요보다 조금은 과장되게 발달된 부위들, 거의 나신 수준의 복장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율동. 입었다기

보다는 몇 조각 천을 걸친 것 같은 복장의 대담함이 주는 건강미. 한창 무르익어가는 운동량 때문에 땀의

흔적이 그려내는 연한 회색 옷 위의 오목하고 볼록하니 젖은 곡선. 별도로 시간내어 도를 닦지 않은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문이었지만 나중에 돌아보는 회상은 싫지 않은 순간들입니다.

 

    봄의 문턱에서 갑자기 영하 5도로 곤두박질 쳐진 오늘 새벽 뜀질 길, 두툼한 방한 웃도리에, 눈만 빠끔하니

 내놓고 얼굴전체를 싸맨 방한 마스크에, 넘어지면 일어나기도 쉽지 않을 두 겹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간

 오늘 아침, 나는 여름의 뉴욕 중앙공원에서 보았던 그 젊은 여성 달림이를 떠올리며 시린 발과 손가락 끝을

녹이려 애써 보았습니다. 봄에 들어서는 통과의례의 이 추위도 오늘 새벽으로써 마지막인가 봅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