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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대화 등록일 2016.09.30 05:12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49



대화                                                                             

 

  어서 와 밥 먹어요! 라는 아내의 두 번째 채근을 신호로 컴퓨터를 끄고 아내와 저녁 식탁에 마주앉았다. 창문을 통해보니, 조금 전 넘어간 태양의 잔광이 맥없이 사그라지고 있다. 겨울의 태양은 힘이 없다. 김밥말이에서 잘려나간 꼬드러진 당근 꼭다리같이 색을 잃었다. 그러나 우리 두 내외는 지금 왕성한 식욕과 저녁 식탁에서 할 푸짐한 이야기로 충만해있다. 식탁 위 젓가락을 들자마자 아내가 말문을 열었다.


  TV의 로드 다큐 프로그램으로 우릴 찍은 그 분들 서울에 잘 올라가셔서 오랜만에 가족들하고 만났겠네요. 그렇게 한 번씩 취재를 나가 일주일씩 떨어져 있다가 가족들 만나면 새삼스럽겠어요. PD 그 분은 8살짜리 딸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지. 무엇을 창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우리가 일주일 동안 보니 찍는 게 그냥 찍는 게 아니더라고. 금요일에 우리 집 저쪽 쪽문 찍는 거 봤잖아, 빛이 부족하다고 한 시간을 기다리는 거. 찍는 분도 그렇지만 PD 그 분은 자기 머릿속에 대본을 생각하며 장면을 잡아 나가야하니까 더 진지하고 더 많은 신경이 쓰일 거야, 그렇지? 가시청 지역이 수도권이라니까 수도권이면 그 숫자가 어디야, 서울, 경기 인구가 이 천만이 넘는다고, 이 천만이. 그 사람들이 지켜보는 TV니까 엄청 날거야. 물론 그 숫자가 다보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대상으로 치면 그렇잖아, 그치? 그것도 경쟁사들 다 의식하며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아마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거야.


  아이, 그 정도 경쟁이 없는 게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경쟁 속에서 그렇게 꾸려 가시는 분들 보면 정말 대단해요. 그러니 당신도 이제 영화나 TV 보면서 저건 뭐가 어떻고, 요건 뭐가 어떻고, 하며 뭐라고 좀 하지 말아요. 그 분들이라고 그런 것 몰라 그러겠어요? 여건이 그러니 그렇지.


  아, 왜 내가 어때서? 먼지 풀풀 나는 사극 추격 장면에 여배우 낯빤대기하고 동정 깃 좀 보라고. 링클프리 크림 쳐 바르고 하이타이로 금방 빨아서 다려 입고 나오는 게 그게 어디 연기야? 청담동 패션쇼장이지. 쫓기다가 먹을 게 없어 칡뿌리 캐먹는 장면의 그 여배우 손 좀 보라고, 스킨로션 발라 빤질빤질하기가 우리 집 개 파-faabie 가 핥은 스테인리스 개 밥그릇 보다 더 빤지르르 윤이 나니, 누가 그 장면에 감동하겠어?


  그나저나 우리는 엄청 자연스럽게 찍은 편이에요, 미리 대본 받아 어떻게 찍을 거라고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니고. 그 날 그 날 우리 일상에 따라 자연스럽게 찍은 거잖아요.


  그렇지. 우리가 TV 다큐멘터리에 나온다고 일부러 동작을 과장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찍었지. 남한강 뛰는 장면 찍을 때도, 실재로 내가 평소에 뛰던 그대로 끝까지 달렸잖아. 양 어깨에 땀이 나서 젖을 때 까지 뛰면서 찍었다고. 시원찮은 영화에서처럼 나는 분무기로 겉옷에 물 뿌리고 땀난 것 같이 그렇게는 안 한다고. , 그런데 그 헬리 캠이라는 것 있잖아, 잠자리 같은 프로펠라 카메라 비행기. 그게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따라오며 찍는 데 와, 그 때는 긴장되더라고.


  아, 그거? 우리 집 지붕 위에서 우리 집 전경을 촬영할 때도 우리가 그걸 휴대전화로 찍으려고 거실로 갔다가, 안방으로 갔다가 하는 바람에 집 안에서 그 헬리 캠 사진 찍는 우리 둘이 찍혔을 것 같은데. 그것 NG 처리되어 안 나올랑가 몰라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촐랑대? 좀 진중하지.


  아이구, 자기는 어떻고? 자기가 더 신나서 뛰어다니더라.


  다큐멘터리라고 찍어서 방영시간이 한 사오십 분 분량이라던데, 내 이야기가 그렇게 긴가? 뛰는 이야기, 풍물하는 이야기, 글쓰는 이야기, 뭐 없잖아, 그 다음은?


  아, 뭐 이야기가 중요해요? 예쁜 우리 집 겨울 풍경만 찍어도 작품 되겠다. 안 그래요?

 

  에이, 예쁜 집 찾으려면야 우리 집 말고도 얼마나 많은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작품은 작가가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달렸지. 지금 이 장면도 얼마든지 작품으로 만들 수 있어. 저 봐, 희멀건 형광등 불빛이 아니고 이렇게 불그레하니 따스한 백열등 불빛에, 로마 시대에 유행하던 커튼 모양이 쳐진 팔각의 절반, 사각 창 안 식탁에서 조용히 저녁식사를 들면서 다큐멘터리 TV 촬영에 출연했던 시골 사는 우리 두 내외의 이야기, 우리가 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재미난 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장면만도 훌륭한 작품이 되어 감동으로 다가 갈 수 있을 걸? , , 여기서 이렇게 식사하는 모습을 어두워진 바깥에서부터 잡는 거야. 조금 멀리에서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백열등 불빛만 잡다가 점점 다가오면서 카메라가 창문으로 우릴 들여다보는 거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영화 그래비티에서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에 고장 나있는 우주선 내부의 우주인 대화를 잡는 롱 테이크 기법으로 말이야. 처음에는 실루엣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의 윤곽만 잡다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조금 잡다가, 카메라 각도가 옆 창으로 돌아가며 다시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이 나오며 대화하는 우리의 눈과 입술만을 로우 ( 아래 )에서 크게 줌 인으로 들어가는 거야.


  아이고, 앉아요. 먹던 밥이나 마저 먹어요. 다큐멘터리 TV 촬영 한 번 했다고 금방 영화감독으로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요. 요기 입 언저리 계란말이 부스러기나 떼고요, 어서 밥이나 먹어요.


  아, 내가 신발 무역 안하고 젊었을 때 영화감독으로 나섰어야되는데.


고만 좀 웃겨요. 제주도로 신혼여행 갈 때 펜탁스 중고 사진기 가지고 가 삼각 다리 하나 살 돈 없어 돌멩이 위에 올려놓고 타이머 맞추고 점점 기울어지는 카메라 초점 따라 언덕 아래로 구르던 위인이 무슨. , 그리고, 지금 이야기 한 그 장면은 그 분들이 우리를 그렇게 찍었잖아요. 우리 저녁 식사할 때 우리 집 바깥 외등 켜놓고 저기 저 바깥에서 이 창 통해 우리 찍었잖아요. 얼레? 이 양반 봐, 생각 안 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장면을 그 분들이 놓칠 리가 없지요. 그 분들은 프로인데. , 어서 밥이나 먹고 설거지 좀 해줘요. 나 얼굴에 마스크 팩 좀 하고 누워있어야겠어요. 일주일 동안 촬영한다고 긴장했더니 많이 피곤하네요.


  자기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니 엄청 신경 쓰던데. 빗을 아예 달고 살던데?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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