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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봄을 기다리며 등록일 2016.09.30 05:07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66



봄을 기다리며

 

   누렁이 개도 낮잠 자다 지쳐 머리를 두 다리 위에 걸치고 두 눈만 껌벅이는 한적한 호남평야의 한 시골 정거장 봄 날 오후, 학교를 파하고 통학차에서 내려 봄 아지랑이 피어나는 너른 들녘을 걸어갑니다. 제법 더워진 날씨에 까만 교복 윗 단추 하나는 풀어 헤치고서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들녘을 걸어갑니다. 짙은 곤색 투피스 교복에 눈이 부시게 하얀 칼라를 한 동네 여학생 한 명이 서 너 발자국 간격을 두고 나의 뒤를 졸졸 따라옵니다. 한 사오리 정도 되는 들녘을 질러서 우리가 사는 동네에 가자면, 드센 타 동네 앞도 지나야 되고, 도깨비가 수시로 출몰하는 도깨비 방죽도 지나야 되고 음산한 측백나무 울타리 음지 옆도 지나야 되기 때문에 그 여학생은 대낮인대도 무서워 혼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네 남학생 뒤를 따라 다소곳이 두 눈을 밑으로 내리깔고서는 두 어 걸음 뒤에 처져 나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여학생 걸음으로 나를 따라 걸어오려면 조금은 버거울 것 같기도 한데 잘도 따라옵니다. 어쩌다 눈앞을 나풀거리며 지나가는 노랑나비 한 마리에 눈길을 주어 잠시 멈춰 서 있으면 덩달아서 그 여학생도 무료하니 가방 든 오른 손에 왼손을 포개고서 앞으로 두 손 가지런히 모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걸으면 또 다시 따라오고. 그러면 따뜻한 봄날의 햇살은 아름다운 그 여학생의 봉긋한 가슴위에 얹혀 앉아 부드러운 음영을 만들며 이 소년의 가슴을 콩당거리게 만들었지요.


  지금에야 브래지어 만드는 기술이 발달되어 앞가슴이 둥그스름하니 불룩하게 보이는 곡선이 참 예쁘게 살려졌지만 그 당시 여학생들 브래지어는 끝이 뾰족했었습니다. 아니 둥근 브래지어를 감추고 있는 겉 교복 그 부분이 뾰족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딸이 없어 마당의 바지랑대에 걸친 빨래 줄을 아무리 훑어봐도 이런 것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당시 콩나물 시루같은 아침 통학열차 칸에는 남녀 학생 가릴 것 없이 아수라장으로 뒤섞이어 타게 되는데, 내 앞에 낑겨 탄 여학생 그 뾰족한 브래지어에 찔리면 나는 죽는 판이다! 라고 나는 용을 쓰며 피하려합니다만, 덜커덩! 기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으악! 그 곳에 내 몸이 맞닿아 결국 찔리고야만 적이 있었지요. 그 때 그 뾰족 찔림의 감촉. 세상천지 그렇게 부드러운 감촉이 얼마나 신기하든지요. 몇 해를 두고도 풀리지 않는 그 수수께끼는 혼자서 논두렁 걸을 때 마다 오랫동안 나를 해죽거리게 만들었지요.


  뒤 따라 걸어오는 저 여학생이 어느 집 누구의 몇 번째 딸인지 모를 리 없지만, 얼추 같은 또래의 이성간 학생이니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볼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 때는 남학생하고 여학생이 손만 잡아도 애가 생기는 줄 알았고, 설사 생기지는 않더라도 손목 잡았다고 동네에 소문 퍼지면 나는 끝장이었지요. 얼레? 그 얌전한 박 생원 셋째가 글쎄, 학교 갔다 오다 정거장에서 논두렁 걸으며 얌전히 손목을 잡았대요, 글쎄! 하면 나는 끝장이었지요.


  그렇게 한 사 오리 정도 되는 시골길을 자로 잰 듯한 거리를 두고 걷는 두 이성, 까까머리에 까만 교모 쓴 남학생과 두 갈래로 곱게 딴 머리, 곤색 교복, 하얀 칼라 여학생, 60년대 대한민국 호남평야 한 구석 만경평야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보랏빛 자운영이 뒤덮힌 너른 논배미는 곧 있을 모내기 쟁기질을 기다리고, 아지랑이 소올 솔 봄기운에 취해 하늘 한 번 올려다보면 종달새 지지배배 푸른 하늘 어디 메 있는지 머리 빙빙 돌리며 숨바꼭질 하게 하던 봄 날. 이윽고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그 여학생은 후다닥! 내 앞을 지나 가운데 고샅 자기 집 사립짝문을 밀치며 인정머리 반 푼도 없이 뒤도 안돌아보고 들어가는 눈부시게 하이얀 교복 칼라의 얄미웠던 그 여학생의 추억.


  그렇지요. 고향의 봄은 언제 생각해도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그리고 고향의 그 봄을 떠올리며 이 혹한에 달려보는 새벽 뜀질은 작은 미소를 가져다줍니다. , 이월 다가고 삼월이 되면 나의 사춘기적 그 때 그 여학생 봉긋한 가슴 위에 내려와 자리하던 그 햇살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혼자서 텅 빈 집 보다가 심심해 처음으로 기어 올라간 벽장 속에서 감춰진 꿀단지 봤을 때처럼, 소싯적 그 여학생 추억으로 봄을 기다리는 내 가슴은 시방 속에서 화! 하니 벌렁벌렁 하고 있습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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