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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나는 떨고 있다. 등록일 2016.09.30 05:27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87




나는 떨고 있다.                                                           

 

아파트를 나와 새벽 뜀길로 갈라치면 거기에 단지를 우회하는 4차선 대로가 하나 있다. 이 대로에 신호등이 있고 이 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면 그 다음에는 단 한 번의 길 건넘 신호 없이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3시간여를 맘껏 달릴 수 있는 한강 강변 길, 남미 안데스 음악에서 따와 내가 혼자 명명한 에스퍼란자스라는 길이 이어진다. 하루 시작 전 운동으로 새벽에 달리러 나가니 내가 이곳을 통과하는 시각은 항상 캄캄한 새벽이다. 뿌연 새벽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빨간 신호등 앞에 서서 뛰기 직전의 몸 풀기를 하며 횡단보도 앞에 선다. 그러면 드믄드믄 무섭게 질주하는 새벽 자동차의 소름끼치는 새벽냉기가 내 온 몸으로 와 덮친다. 평소보다 기다림이 더 길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 영하의 날씨 탓 일게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방한모에 안면 마스크까지 한 얼굴을 좌로 우로 돌려 다가오는 차량의 유무를 확인하며 길을 건너려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바로 떨어지지가 않는다. 저 쪽 어둠 속에서 이곳을 향해 질주해 오는 차량의 전조등은 그 위세로 보아 정지신호인 빨간 신호등은 아예 무시하려는 듯해서이다. 내달아 오는 속도 그대로 질주해오는 모습을 보이니 나는 4차선 도로를 건널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인도에서 차도인 횡단보도로 두 걸음을 내려 왔지만 그 이상은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달려오는 차량을 바라보며 그대로 서있다. 파란 신호를 받아 이제는 당연히 보행자의 권리를 찾을 때가 되었지만 길 건넘을 유보당한 나는 무시무시한 차량 전조등 불빛 속 저 너머에 숨은 운전자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도로를 두어 걸음 건너다가 멈춰 선다. 그런 나를 본 새벽시간 4차선 도로상의 그 운전자는, 내가 길을 건널 의사가 없다! 라고 판단했나보다. 달려오는 그 속도 그대로 그냥 무정차 통과다. 횡단보도상의 보행자 보호의무는 도로변에 걸려있는 색 바랜 플래카드 속 활자일 뿐이다. 나는 길을 건널 수가 없다. 그 다음 그 뒤를 따라오는 또 한 대의 차량도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다. 서줄지 안 서줄지 이런 불확실성에 나의 몸을 맡기고 이 길을 건널 수가 없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세 번째 차량의 돌진에 내 온 몸으로 길을 걷고자하는 의지를 내보이며 제동을 걸어본다. 반걸음을 더 앞으로 나가며 소름끼치는 전조등 불빛 속의 운전자와 비굴한 눈맞춤을 시도해본다. 그리고 반걸음, 반걸음, 왼발, 오른발.

 

독일의 아우토반에 가보았지만 정지선에서 그렇지 않다. 큰 핸들 조작 없이 몇 시간을 달리는 남아프리카 대평원 고속도로도, 호주의 끝없는 하이웨이도 가보았지만 정지선에서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규정대로 멈춤은 기본이고, 그 앞에 서있는 선의의 보행자에게 그 어떤 불안감을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보다 산업화가 먼저 되어 어쩌면 초장에는 지금의 우리와 같은 상황이 있었겠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 그걸 법에 엄격하게 적용시켰을 것이다.

 

한 달 전, 이 횡단보도에서 할머니가 차에 치였다. 그 때 나는 새벽 뜀질을 거의 끝내고 여기 이 횡단보도 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 뒤 잴 것 없이 현장으로 달려가 아스팔트에 내 몸을 납작 엎드리고, 할머니의 머리를 왼손으로 받쳐들며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쓰러진 할머니 등 밑에 밀어 넣어 차가운 아스팔트 냉기를 막아주려 했다. 나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애써 누르며 쓰러진 할머니에게 가만히 말했다. 차에 받힌 충격으로 얼이 반쯤 나가 자꾸 파란불, 파란불이라고헛소리를 하는 할머니에게 과장된 침착함으로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119에 내가 연락 할테니 가만 계세요. , 그래요. 할머니가 길을 건널 때 파란불이었어요. 내가 증언 할게요“. ”, 증말이당게. 파랑불이당게. 저기 저 사람 어디다가 핸드폰으로 전화하네. 내 불이 빨강 불이었다고". 나는 내 울분을 가래삼아 전화질을 하고 있는 그 운전자를 향해 뱉고 싶었다. 눈물에 번진 신호등 알속의 LED 전구 광원으로 수 만개 파편을 만들어 그에게 날리고 싶었다. 엎드린 채 고개를 드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파란신호등이 울고 있었다.

 

오늘 새벽, 나는 또다시 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주머니 속에는 짱돌 하나가 내 손안에 쥐어져있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량의 운전자에게 던질 짱돌 하나. 나는 지금, 이 돌을 던지어 발생될 상황에 떨고 있다. 이 사회의 거대한 불합리에 대해 똑바로 맞서지 못하고 항상 돌아서서 울분을 삭여야만 하는 초라한 용기에 대해 떨고 있다. 무엇보다도, 연락받고 파출소로 달려올 아내의 첫마디에 떨고 있다. ' 당신이 뭔데 경찰서장도 안 던지는 돌을 던져요? 돈거 아녀? '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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