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그 위대한 힘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남과 싸울 일이 있어 주먹을 쥐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툼 중에 우발적으로 상대방을 가격한 적도 물론 없습니다. 너무나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며 내 약을 바득바득 올려서 내가 내 풀에 못 이겨 그 사람 얼굴에 침을 뱉어 즉결 심판정에 끌려 나간 적은 있지만 이 또한 나의 연약한 심성의 소산으로 그 판사님은 날 잘 이해해주어 집행유예를 선고해 주었고 나는 만약을 몰라 준비해 간 벌금 납부용 현금도 그냥 되로 가지고 온 적은 있습니다만, 결단코 남을 해하기 위해 주먹을 쥐고 정식으로 맞서 싸움을 건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내가 어느 해 겨울, 새해도 얼마 지나지 않은 정월 초, 쌩쌩 칼바람이 부는 밤 12시에 서울 시내의 한 학교 운동장에 서서 오늘 밤 나와 사생결단을 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나는 이 사람에게 이 메일을 보내 정식 결투를 신청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보낸 이 메일의 내용은 딱 네 줄이었습니다. 님은 님의 신념대로 살지만 나는 나의 신념대로 삽니다. 님께 결투를 신청합니다. 결투방법은 비 무장, 맨 주먹으로 둘 중 하나가 숨이 끊어질 때 까지, 혹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항복의 표시로 손바닥으로 땅을 세 번 칠 때 까지. 결투 장소는 서울 시내 모모 학교 운동장, 시각은 밤 12시. 나는 밤 11 시가 조금 지난 시각, 늦지 않게 차를 몰고 결투장소를 향해 동부간선로를 따라 북쪽으로 밤하늘을 덮고 있는 밤공기를 쌩! 갈랐습니다. 차가 돌진하며 만들어내는 바람의소리가 곧 있을 무시무시한 결투장의 피를 부르는 전주곡같이 음산했습니다. 기다려! 내 오늘 너를 요절을 내 줄 것이다. 바닥난 나의 인내심, 그 거죽 속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너는 날 잘 못 건드렸다. 이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시시비비가 문제가 아니라 한 번 성난 나의 자존심의 실체가 문제다. 태어나서 나 자신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자존심의 실체, 너에게 보여주는 것도 그렇지만 나 또한 보고 싶다. 내 분노의 바닥이 어떠한지 나 또한 알고 싶다. 기다려라! 평소 같으면 음악이 없이 차를 모는 법이 없었건만,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음악도 싫고 생각도 싫었습니다. 그저 내 눈앞에 이글거리는 분노만이 나를 무의식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내 상대를 가격해서 제압 할 궁리만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 때 어설프게 배운 태권도 폼을 떠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가격은 설사 내가 그 상대를 제압했다 하더라도 성이 찰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고등학교 정규 수업시간에 배운 유도의 호신술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상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멱살을 잡아 뒤로 밀면 상대는 안 밀리려고 자세 중심을 앞으로 당겨 올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벼락같이 몸을 말똥구리처럼 둥글게 만들며 상대를 내 등과 머리의 구겨진 곡선을 따라 엎어치기로 땅바닥에 패대기치어 쓰러뜨리고, 그리고 전광석화같이 달려들어 목조르기로 들어 갈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게 내 머리를 축으로 나와 상대를 시계방향으로 뱅글뱅글 돌리며, 죽어라 잡은 목줄을 거머쥐고, 그래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입니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검은 가죽 잠바에 검은 가죽 장갑, 손가락에는 알이 큰 구리 반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차를 운동장 입구 한 쪽에 주차시켜놓고 대결 상대자의 출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둘 중 누구 하나 오늘 밤 죽어 나갈 것입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니 한 겨울의 바깥 온도는 마이너스 10도 이하까지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쌩쌩 찬바람, 운동장 한 가운데 대결 장소에 서 있으니 단 몇 분도 못 되어 몸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추위를 이기려고 운동장을 서서히 뛰기 시작합니다. 캄캄한 학교 운동장, 저 멀리에 겨우겨우 보이는 교문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힐긋힐긋 관찰하며 학교 운동장을 뜁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오늘 밤 목숨을 건 심야의 결투 상대자가 나타날 때 까지 뜁니다. 약속한 자정이 넘었습니다. 운동장을 뛰는 숫자가 10 바퀴, 20 바퀴, 30 바퀴를 넘었습니다. 두꺼운 내복과 가죽 잠바로 무장한 내 몸 안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도 느낍니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시무시한 사생결단을 하고 잘못하면 오늘 밤 사람 하나가 죽어나갈 결투의 현장, 칼바람만 쌩! 하고 음산한 학교 운동장을 질러 갈 뿐, 너무나도 고요하고 음산한 한 겨울의 어둠, 고요 그리고 무심한 밤하늘의 별들. 별들.. 아, 한 시간 여 이렇게 달리기를 하다보니 지금은 내가 여유부리며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보고 있군요. 이곳에 오기까지 사람 하나 죽어 나갈 상황을 그리며 오직 결투, 결투의 투쟁 구호를 외치던 나의 가슴에 한 시간 여의 달리기로 따뜻한 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적인 이성 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의 힘, 분노를 삭여주는 위대한 힘, 단지 뛴다는 동작 하나가 이렇게 나를 변화 시켜주는가요? 조금 전 물과 불을 못 가릴, 아니 그럴 마음이 들 줄 걱정하며 딴 생각의 이입을 거부하던 나가 아니었던가요. 운동장 돌기가 30 바퀴를 넘어서며, 달리기의 시간도 그렇듯 길게 넘어가니 나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고, 오늘의 이 문제가 반 내 책임으로 조금씩 무게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설사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하더라도, 내가 한반도 횡단, 종단 마라톤을 하며 주로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이 세상을 향한 끝없는 찬미 정신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내가 복수니, 결투니 이런 되어먹지 않은 단어들을 갖다 붙이다니.. 아, 내 미성숙으로, 나의 모자란 지성으로 나는 또 한 번 큰 잘못을 저지를 뻔 했구나.. 달리기를 멈추고 주차해 놓은 차로 들어와 땀에 젖었다가 식으면서 엄습한 추위를 녹이기 위해 급히 차의 히터를 작동시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서서히 차를 발진시켜 이미 자정을 훨씬 넘긴 운동장을 빠져나옵니다. 결투의 상대자는 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온다하더라도 나는 결투를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의 한 시간 여 달리기가 나의 분노를 이미 다 삭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지금 나타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덕분에 잘 뛰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나 오늘 밤 또 한 가지 배웠습니다. 분노를 삭여 주는 그 위대한 힘, 달리기. 내가 당신께 신청한 결투를 철회합니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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