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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어느 타이완 여학생 등록일 2016.11.01 11:39
글쓴이 박복진 조회 2041

 

어느 타이완 여학생


마라톤 대회 후, 우리같이 달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자연스레 이야기되는 것이 그 대회가 달리는 주자들을 위해 어떠한 자세로 임해 주었나? 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단순히 미지근한 물을 주었느니, 시원한 물을 주었느니, 나누어준 티셔츠가 고가니 저가니 하는 것들은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으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그런 것들에게 시시비비를 걸고 또 걸리는 분들은 대단히 죄송하오나, 진정으로 달리기의 즐거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분들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풋내 나게 보입니다. 글쎄요, 저는 오히려 매 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최소 하나만이라도 건져내서 제 달리기 추억의 앨범 속에 오래 오래 간직하게 되면 이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뭘 더 바라겠습니까?

얼마 전에 대만에서 국제 울트라 마라톤 대회가 있었습니다. 24시간 주라고 하는 대회인데, 타이페이 외곽 수초우 대학 구내 운동장 트랙을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다소 엽기적인 울트라 마라톤대회였습니다. 참가해서 뛰는 사람, 진행위원, 구급요원, 자원봉사요원, 구경꾼 모두 달리기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인내심을 보유한 사람들의 행사입니다. 마라톤을 좀 한다는 분들에게 조차 다소 기이한 대회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400 하고도 소숫점 이하 몇 미터 트랙을 쉼 없이 돌고 또 도는 달리기, 주자들이 어지럼증을 호소할 까봐, 4시간마다 호각을 불어 달리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역 방향으로 달리고, 매 한 시간마다, 몇 번 선수 누구는 몇 바퀴를 돌고 몇 번 선수 누구는 몇 바퀴를 돌았다고 장내 마이크로 공표를 하고, 달리는 자세가 이상하면 현장에 대기 중인 의사가 강제로 주자에게 혈압과 맥박을 재게 하는 대회입니다.

이렇게 24시간을 꼬박 채우는 마지막 몇 십분 전부터는 대회장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하며 주자들의 개인 기록 갱신과 순위 경쟁으로 마지막 무서운 집념, 오기가 목격되는 대회입니다이미 고갈된 체력으로 사색이 다된 주자들이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외치며 마지막 몇 초까지 달려서 지옥 같은 24시간을 채우고 뜀을 마치면 계측요원들이 달려들어 뒷발 발꿈치까지 줄자로 재어 개인 기록을 적게 됩니다. 네 엽기지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한국팀에 배치된 수초우 대학의 어느 두 여학생 자원봉사자입니다이 둘은 저도 잘 모르는 소녀시대 노래를 곧잘 부르기도 했는데 이들의 자원봉사 자세가 저를 감동 시켰다는 것이지요. 이 두 여학생은 그저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씀만하시라는 자세로 낮이건 밤이건 대회 기간 3일 동안 헌신적 밀착 그림자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감동적인 봉사는 대회 종료 후 주자 계측요원이 다가와서 공식 거리를 계측할 때 까지, 그리고 대만의 모 TV 방송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회 종료 호각이 울렸을 때, 선수들이 멈춰선 곳은 운동장 트랙 한가운데라 대만의 아침 햇볕이 몹시 따가웠습니다. 우리 한국 선수의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진 소금이 잔뜩 쩔어 있었습니다. 이 소금기를 가녀린 두 여학생이 자기들 손바닥으로 훑어 내려주었습니다. 엄마를 향해 달려오던 아기가 흙바닥에 넘어져 묻은 이물을 털어주는 두 살 배기 엄마의 손처럼 모정에 가까운 행동이었습니다. 따가운 태양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선수가 미간을 좁히자 이 두 여학생은 자기들 두 명의 네 손바닥을 쫙 펴서 부채를 만들어 선수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며 짧지 않은 TV 인터뷰 내내 함께 해주었습니다.

여학생 두 명이 손바닥 네 개를 쫙 펴서 부채를 만들어 선수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그 장면. 그건 국적을 뛰어넘는 우정이었고, ! 하고 치어 올라오던 감동이었고 나에게서 달디 단 눈물을 훔쳐가는 기분 좋은 도둑이었습니다. 5 년여 가 지났지만 대만의 24시간 주 울트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기억입니다. 대만 국제 울트라 마라톤 24 시간주를 치루며 보고 겪은 수많은 장면 중에서 이 손바닥 부채 명장면 하나를 뽑고 돌아와 저의 달리기 앨범에 곱게 접어 넣고, 이렇듯 언제고 끄집어내어 다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복입니다


춘포
박 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2016년도 세계 울트라 마라토너 연맹 24 시간주 아시아/오세아니아 선수권대회가

1119일 대만의 카오슝에서 열립니다. 저는 IAU 아시아/오세아니아 수장 자격으로

초청받아 현장에 가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장면이 나의 달리기 앨범에 들어와 오래 오래 자리하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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