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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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55년 등록일 2017.06.09 09:55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91


55

                                                         

 

지난주에 치러진 가을 운동회 흔적은 이 운동장 아무 곳에도 없다. 청군의 영예를 한 몸에 모아 용감하게 진군하던 기마 선수들의 함성도 없다. 세상천지 무적 백군의 머리띠에 묻었던 영광스러운 흙 부스러기들도 만국기의 흩날림도 없다. 벌써 몇 시간째 나는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다. 내 몸 어디 뼈가 부러졌나보다. 나는 친구들과 놀다가 공중에서 나가 떨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쓰러져 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자기 책보들을 챙겨 어깨에 메고 죄다 집으로 갔다. 그들이 당연히 나의 사고를 우리 집에 알릴 것으로 믿고 있었다.

 

논바닥에 누운 볏단 위로 쏟아지던 한낮의 따가운 가을 햇살도 다 사그라지고 내 몸뚱이에 스멀스멀 추위가 덮쳐온다. 그 때까지 보이던 멀리 교무실의 팻말이 내려앉는 어둠으로 보이지 않는다. 공포가 나를 엄습한다. 반바지 아래 맨살 다리에 흙을 긁어모아 덮어본다. 어둠이 운동장 구령대 쇠받침 다리를 삼키기 시작한다. 너무 극심해서 못 느끼는 것일까? 나를 덮어오던 공포심이 약간 주춤해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별빛을 만들어본다. 왜 아버지가 안 오실까? 내 몸뚱이 어딘가가 부러져서 꼼작 못하고 운동장에 쓰러져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한 걸음에 달려 오실 텐데.

 

 

학교 후문 저쪽에 시커먼 물체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갈 방향을 잃고 좌로 우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아버지인가보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요, 라는 함성은 목구멍 속에 달라붙어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그보다 먼저 반응하는 것은 눈물이다. 나는 울기 시작한다. 부러진 내 몸뚱이 뼈 어딘가의 고통보다는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홀로 내팽개쳐진 세 시간여의 공포가 더 서러워 울음보가 터진다. 그런 공포를 이제야 끝내주는 아버지의 늑장 출현이 더 서러워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쏟아진다.

 

, , 이눔아야! 너 시방, 왜 그러고 자빠져 있냐? ? 어디가 어떻게 돼서 그러고 있냐? 왜 깜깜허니 날 저물었는디 와서 밥 안 먹고 헛간 싸리비같이 뎅그러니 그러고 혼자 있냐고오? ? 어디. 뼉따구가 부러진 것 같다고? 팔공생이가? 어디? 일로 둔너 봐. 란닝구는 또 왜 지까닥같이 너덜너덜 허냐? 아침쩌르 새로 입은 옷 아녀? 어디? 여기, 삽 모가지 같은 디 여기, 여기 아녀? 아녀? 다리여? 여기, 여기 아녀? 그럼 여기 물팍여? ’

 

날은 저물어 오는데 밥 먹으러 들어오지 않는 애가 걱정이 되어 아버지는 고샅 고샅을 헤집고 다니며 또래 애들을 잡고 다그쳐 물었다. 제일 마음 약한 애한테서 들은 이야기, 학교에서 같이 놀다가 폴짝 공중에서 떨어졌는데 어디가 부러져 지금 학교 운동장에 있다고 토설했다. 그러자 끝단 말린 바지를 잡고 득달같이 달려온 아버지가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말들이다. 혼날까봐 친구들은 아무도 가서 이야기를 못 했나보다.

 

, 이쪽으로 돌아서 다시 둔너 봐야. 어디여? 여기 아녀? 여기가 죄끔 뙷똥헌디, 여기여? 야봐라, 뼉따구가 부러져 속에서 옆으로 삐졌나보네, 인자. . 창사구나 안찔렸는가 몰르겄다. ? 아이고 참말로, 어쩐디아? 여기 아녀? 긍게 그럼 시방 여기여?’

 

, 그렇게 안 아픈 것같이 의뭉허니 능그정 피지 말고 말을 혀봐, 이눔아야, ? 어디가 어떻게 삐딱헌지 말을 혀봐야 알 것 아녀, ? 눈먼 당달봉사 남의 살 만지듯이 그렇게 뚤레뚤레 허지만 말고오, 어엉? 아 그러고 추석 밍절 지난 지가 언젠디, 니가 무슨 째쟁이도 아니고 왜 춘디 반바지만 입고 댕겨, 으어? 아이고오, 사람 잡겠네. 추워서 어쩐디야. 얼른 이 우와기로 맨살부터 덮어라. 종일 흙뻘에서만 놀았나, 왜 이렇게 손모가지는 시커머티아. 까마귀가 성님! 허고 폴짝 앵기겄네. 대수기 여기 흙 좀 봐. 좀 숙여봐라, 여기는 갱기찮혀? 그럼 다리만 어장난겨? 어여 가자! 어여 집으로 가서 낼 새복같이 솜리로 가자. 시방은 천지 분간 깜깜헝게 그냥 집으로 가자. 어여, 내 등짝에 어븐디봐라. 어여. 아이고오 시상이나 이 무슨 쪼간이디아, 아이고오. 썩을 노옴 새끼덜, 같이 놀다 다쳤으면 얼릉 와서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야기를. 호랭이도 안 물어갈 놈들. 똥을 바작으로 싸고들 있네들.’

 

반백의 머리칼 노인행색으로 만행삼아 어제 고향에 내려온 나. 나는 지금 그 때 그 초등학교 운동장 바로 그 자리에 서있다. 질 좋은 카메라로 연속 촬영되어 갤러리에 저장된 최근 사진처럼 그 때 그 장면이 하나, 하나 운동장을 펼침막 삼아 펼쳐지고 있다. 아버지가 55년 전 나에게 내주셨던 그 큰 등을 다시 내주고 계신다. 환장하게도 질펀하고 끈적이는 내 고향 사투리,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귀 귓바퀴에서 출구를 못 찾고 계속 맴돈다. 나는 지금 휑하니 그 때 그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가느다랗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한 세월의 끈을 두 손으로 겹쳐서 당겨 잡고 서있다. 웬수 같은 세월이라는 토사물이 목에 걸려 숨이 차온다. 이 자리가 우금 55년 만이다.

 

팔공생이 : 팔뚝꿈치

둔너봐 : 누워봐

지까닥같이 : 걷절이 김치의 가닥같이

물팍 : 무릎팍

뜃똥하다 ; 툭 불거져있다

의뭉떨다 : 속으로 엉큼하다

능그정 : 능글능글함

째쟁이 : 멋을 내는 사람, 낸 사람

새복같이 : 새벽에 일찍

어븐디다 : 등에 엎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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