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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첫 편지 등록일 2017.04.28 14:20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40




첫 편지

 

지난 밤 저는 따뜻한 이불속에서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잤습니다. 어느 때처럼 평온하게 눈을 뜨고 옷을 입고 새벽 달리기도 즐겼습니다. 남한강변을 달릴 때는 많은 수의 물오리 떼도 보았습니다. 강물의 수면이 놋쇠그릇 만들 때 초벌 망치질 해놓은 것처럼 잔잔한 솟음과 꺼짐이 많았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매우 반반한 남한강 강물의 유유한 흐름이었습니다.

 

라디오의 아침 음악을 들으며 동쪽 창으로 보이는 연산홍의 붉은색에 눈을 담가서 실눈을 만들어보다가 아침식사 준비완료를 알리는 아내의 노오란 작은 종소리를 듣고 식탁에 가서 앉았습니다. 달팽이 무늬 식탁 창 커튼이 완전하게 제켜져서 대문과 마당 텃밭의 정경이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일부는 내 두 눈에 다 못 들어오고 뒤로 가서 순서를 기다리고 또 일부는 밀려서 바닥에 흘려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금방 구운 베이글 빵을 반으로 잘라서 며느리가 직접 만들어 보내온 잼을 바르고 그 위에 치즈를 발라 한 입 먹고는, 아내가 텃밭에서 캔 연한 쑥으로 끓인 쑥국을 먹었습니다. 쑥을 으깨서 퍼런 물 빼내고 무, 들깨, 멸치, 다시마 등으로 국물 내어 콩가루와 밀가루 조금 넣고 된장 넣어 끓인 이 세상 최고의 쑥 된장국입니다. 그 옆에는 식사가 끝나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있는 찻잔들의 애교가 발레복입고 출석 호명 기다리는 여고생처럼 귀엽습니다. 세상 각처에서 온 우리 내외의 포획물입니다. 런던, 파리, 모나코, 산세바스티안, 헬싱키, 텍사스, 케이프타운.. 오늘은 어느 잔으로 마실까? 주인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님. 너무나도 평온한 이 일상이 누구의 덕인지 저는 잘 압니다. 물을 것도 없고 따질 것도 없이 장모님 덕이지요. 신혼 초, 어느 날인가 아내로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해외출장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부엌에 정한수를 떠놓고 사위의 무사귀국을 빌어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니 그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철따라 계절따라 이름을 걸며 부엌 귀퉁이에서 두 손 모아 친지신명께 딸과 사위의 무탈을 빌어오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손 모아 슥삭거리시는 그 손비빔 소리가, 그저 우리 딸 우리 사위 우째꺼나, 우째꺼나로 시작되는 장모님표 법화경 구문이 세상 온갖 잡귀잡신 다 도망가게 해주시어, 오늘까지 우리 내외 큰 고초없이 무탈한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난 자식,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고 온갖 구박 다 받으시며, 그 딸에게 물려줄 젖 있으면 아들에게 주라고 불호령을 내리신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내인 딸에게 도둑젖을 물리실 때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렇게 키운 고운 큰 딸을 무일푼 박서방, 저에게 시집보내실 때 얼마나 섭섭하셨습니까? 혼수로 장만해주신 장롱이 단칸방 문지방에 걸려 안 들어가고 알록달록 혼수이불은 단칸방 방바닥을 절반만 덮고 나머지 절반이 밤 낚싯대의 찌처럼 꼿꼿하니 머리 쳐든 것 보시고 얼마나 애가 타셨습니까?

 

어머님. 무뚝뚝하고 멋대가리가 없고 시골 찌락소같은 옹고집 못난 사위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하셨지요? 세상천지 모두가 벌어오는 그 도라꾸 가득채운 돈을 당신의 맏사위는 벌어오지 못해 안타까웠지요? 신혼 초, 저의 쥐꼬리만한 봉급, 그나마도 거둬서 형제들 줄 곳이 많아 여기저기 찢어서 틀어막다가보면 찬거리 옳게 못 사는 것을 아시고 아직 시집 안 간 처제를 보내 사돈집 대문 밖에서 만나 돈 찔러주고 오라고 등 떠밀 때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큰딸이 잘 살아야 나머지 줄줄이 아래 딸들도 잘 산다고 앉으나 서나 큰딸 걱정, 큰 사위 걱정으로 숨 한 번 크게 못 쉬시고 살아오신 어머님. 늙은 시어머니 수발로 청춘 다보내시고 허리 좀 펴시려다가 병든 지아비 수발로 또 한 청춘. 그 와중에도 큰딸, 큰사위 위해서 막사발 정한수 떠놓고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으며 비벼대던 당신의 두 손. 내 자식만은 남들 앞에서 우세 안 당하게 하려고 모자란 것, 덜된 것 감추고 덮으시며 사신 지난날들이 여기 제 가슴에 양각되어 뚜렷하게 살아있습니다.

 

어머님. 구순 가까운 당신의 오늘 어버이날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감사의 첫 편지를 써보는 큰사위입니다. 큰 부끄러움으로 고개가 자꾸 떨쿠어집니다. 만난 것 사드시라고 용돈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여니, 당신께서 나 몰래 지갑 안에 꼬깃꼬깃 접어 넣어놓으신 빨간 부적이 제 숨을 멎게 만듭니다. 접힌 부적위에 큰사위라고 소유를 적어놓으신 큰자의 키읔이 너무나도 커서 아래에 찌부러진 니은자가 저의 목울대를 위로 잡아챕니다. 크게 읽어 드릴꺼라 작심하고 다 써놓은 편지, 보나마나 빤하게 들고서 읽지 못하고 망설일 저를 위해 슥삭 슥삭 오늘 한 번만 더 빌어주세요.

조왕님, 우째꺼나 우리 사위.. 우째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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