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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갈등 (1) 등록일 2017.04.03 14:05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52




갈등 (1)                                                                        박복진

 

 

   검은색 그 가방은 메주덩이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손으로 든다기보다는 어깨에 메고 다니는 용도가 더 많은 듯,

많이 사용한 긴 어깨끈이 가방에 한번 반쯤 감겨져있었다. 검은색이라고는 하나, 원단이 두껍고 조직이 촘촘하지 못해서인지

검정의 농도가 많이 약해져보였다. 제법 큰 나무의 가지 사이에 단정히 끼어져 있는 모습이 비록 말 못하는 물건이라고는 하나

겉으로 풍기는 품격은 있어보였다. 허투루 팽개쳐지는 물건이 아닌 성 싶었다.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수많은 물건들 중, 내가

귀히 여기는 상위 그룹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그 작고 검은 가방은 몇 걸음 지나친 나를 꽉 잡아 그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나를 붙잡은 그 가방의 마력은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거대한 서치라이트처럼 나를 한방에 덮쳤다. 나는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잠깐 내 앞을 보았다. 고개는 빤히 들었지만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없었다. 어릴 때 형들 따라 긴 들판을 걷다가 변의를

느끼고 서서히 뒤로 쳐져서 온 신경이 둔부에 모일 때처럼, 시선은 전방이나 신경은 다른 곳에 집중되었다.

 

   35,000여명 참가자로 북적대던 오늘의 동아마라톤대회는 끝난 지 오래되어 주변에는 나 혼자 있었다. 백여 개나

되는 마라톤 동호회 천막들은 이미 다 걷혀나가고 없었다. 저쪽 끝에서 행사 천막을 철거하는 마지막 몇 명 안 되는

인부들의 모습만 보일 뿐, 3월 하순의 잠실운동장 오후는 스산함이 스멀스멀 떼 지어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뒤로 돌아 서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나무 앞으로 갔다.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아프리카 큰 뱀을 건드려보는

고양이과 동물처럼, 고개는 약간 뒤로하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나무 사이에서 뺐다.

그 때 한 쪽 어깨에만 걸쳤던 내 배낭이 어깨에서 흘려 내려올 것 같았다. 얼른 반대쪽 어깨를 낮추고 배낭을 한 번

풀썩 거려 어깨 끈을 다시 올렸다.

 

   없는 용감함으로 거짓 무장된 오른 손으로 그 가방을 잡았다. 누가 보고 있다가 지금 무엇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무엇하고 있다는 정당성이 안 보이느냐고 되물을 그런 자세를 유지했다. 그 가방을 잡고 겉을 잠깐 살폈다.

나는 지금 상황 판단을 위한 예비 동작만을 하고 있지 결정적으로 무슨 소유와 연관된 행동을 하고 있는 중이

아니다, 라고 계속 최면을 걸었다. 사실도 정말 그러니까. 그 검은 가방의 소유자일 법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다시 고개를 들어 한 바퀴 돌려보았다. 돌아가는 고개는 감정이 없이 스르르, 인공지능 로봇처럼 똑같은 속도였다.

돌리는 그 속도가 느려지면 안 되는 것처럼, 멈춤이 없이 똑같은 속도로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의식은 끝났다. 이제 이 가방을 열어도 될 충분한 내 합리화가 만들어졌다. 짙은 검정색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로 된 고리 모양의 잠금장치를 엄지와 검지를 벌려 살짝 누르자 똑! 하고 뚜껑이 열렸다. 이 똑! 소리는

그 플라스틱 재질이 조악한 재생품이 아니고 순정부품이라고, 즉 이 가방은 고가품이고, 가방 속 내용물도

아주 비싼 것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녹음된 소리 같았다.

 

   그 속에는 일견해도 알아볼 고가의 카메라가 있었다. 아니다. 열기 전에 그 가방은 카메라만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단지 그 가방이 빈 건지, 채워진 것인지만 알아보면 되었다.

속은 마땅히 그 안에 채워져야 할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다. 프로용 고급 캐논 카메라, 줌을 당기고 미는

기능이 탑재된 렌즈가 길게, 거만하게 붙어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도둑이 훔친 보석함을 열었을 때 안에서

환하게 빛나던 만화 속 그림처럼, 나는 그 안 검은 카메라 뭉치에서 뿜어 나오는 하얀 광채를 느꼈다.

그 옆 칸막이 안에는 두툼한 별도의 망원기능 렌즈와 필터 부속품도 여럿 있었다. 사내로 태어났다면

꼭 갖고 싶은 귀한 물건이다. 아니, 딴 사내까지 들먹거릴 필요가 없이 내가 평소에 값이 비싸 구매는

고사하고 구매하고 싶다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던 고가 장비다.

 

   가슴이 떨렸다. 아이고요!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내려오지도 않은 내 어깨위의 배낭을 다시 한 번

더 풀썩 거렸다. 내 동작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빠르게 두뇌가 회전됨을 느끼었다.

누군가 동료의 마라톤 참가 사진을 찍어주고, 동호인 천막에서 뒤풀이를 하고, 그러고는 가방을 잘 챙겨놓는다고

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놓고는 그냥 갔다. 오래 썼으니 버리고 새 것 사려고 놓고 갔다? 가당치 않은 가설이지만

나는 그쪽으로 사고의 방향타를 잡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카메라와 나하고의 필연적인 인연을 유추하려 노력했다.

우연히 주운 이 카메라로 세계적인 늦깍이 카메라 작가가 된다? 내가? 그럼 나는 이 카메라의 습득이 정당화된다?

 

   우선은 남의 것에 접근한 내 행동의 합리화로 얼른 가방 안 조그만 주머니를 뒤져 소유주의 명함이나 연락처 등의

내재 여부를 살폈다. 이걸로 연락하면 금방 소유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고 동시에 그만큼의 안타까움도 주었다. 운명은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야릇한 기쁨은 커져갔다. 가방의 뚜껑을 닫고 목을 돌려 주변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관찰의

회전각도가 아까보다 작았다. , ! 나는 이미 있을지 모를 소유주의 출현을 밀어내고 있었다. 다시 열었다.

카메라 외 다른 것이라고는 렌즈를 닦는 면 조각이 유일했다. 그 면조각의 색깔은 떨어져 오래된 늦가을 밤의 밑둥처럼

 연한 갈색이었다. 이 연한 갈색 천 조각이 나에게 뜻 모를 자비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다음의 내 행동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주변을 다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내가 상황판단을 뭉그적거리는 사이에 이 카메라 소유주가 저 쪽 끝에서

 금방 달려오는 것 같아 다시 둘러보았다. 심정적으로 그럴만한 동작을 취하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잠실 운동장의 야구장 쪽, 마라톤 동호회 천막들은 이제 다 걷혀졌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늦게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지, 그러다가 이렇게 고가의 카메라 가방을 줍게 되었는지의 환희와 비탄의 감정이, 진한 밀가루 반죽을 섞는

기계 반죽 회전봉 속에 엉킨 듯 휘익, 휘익 돌아갔다.

 

   자, 나는 이제 판단을 해야 하고 그 판단에 따라 내 육체를 움직여야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이 카메라의 성능과

고가 그리고 사내로서의 강한 소유욕으로만 꽉 채워져서 다른 이성적 판단을 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눈 내린 초겨울,

따다 남은 포도 알갱이처럼 나의 이성은 바싹 쪼그라 없어졌다. 내게 굴러온 주인이 없는 이 카메라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문 내 입 속에서 울대가 침 없이 올라왔다가 금방 다시 내려갔다. 그 동작으로 인해 내 턱이 안으로 조금 당겨졌다가 다시 펴졌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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