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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또 미루어지다 등록일 2016.11.16 06:24
글쓴이 박복진 조회 2126
전원일기, 또 미루어지다

또 미루어지다

오늘은 작심을 하고 달라붙어 이 일을 해치워야겠다. 이곳 시골에 살면서 배워지는 게 느리게, 미루어가며 사는 현명함이라지만 이 일은 너무나도 많이 미루어졌다. 잔디 마당에서 데크로 올라오는 목재 계단 2단이 자꾸 밑으로 가라앉아 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발바닥으로부터의 감촉이 매우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의 이용에 의한 자연 침하와 계단의 안 부분이 흙과 닿아 썩어서 받침 역할을 못 해주고 있는, 이걸 수리해야겠다. 아니 이걸 빨리 어떻게 해놓으라고 하는 오래된 아내의 령을 오늘은 수행해드려야겠다.

일상에서 틈틈이 모아놓은 각목들이 있는 창고로 가서 마땅한 사이즈의 재목을 찾았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 딱 맞는 사이즈가 아니면, 이 정도 두께의 나무를 자르는데 꽤나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될수록 톱질이 필요 없는 사이즈의 나무들을 골랐다. 톱질은 시작하고 나서 몇 번 하면 금방 힘이 든다. 하던 톱질을 멈추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시작하면 금방 싫증이 나며 어떨 적에는 신세타령까지 나온다. 아파트에 살 때 같으면 구내전화 한 통화면 되는데, 무슨 잘못된 바람을 안고 나자빠져서 여기 시골까지 굴러오게 되었나, 하는 신세타령이다. 

주섬주섬 재목들을 들어 가슴에 안고 창고를 나와 데크 계단 앞 잔디 마당에 우장장창 내려놓았다. 휴일에 이런 일로 시간을 보내다니. 내가 알기로 이 동네에 사는 은혜 아빠는 이런 일을 참 잘한다. 잘하는 것이 나보다 똑똑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 분은 관련 연장이 충분히 있기에 잘 할 뿐이다. 전기톱도 있고, 작업대도 있고, 칼이 안 들면 쉬이이잉! 소리 내며 날을 가는 칼갈이 모터도 있고. 만약 누가 나보고 도구사용 지능지수가 낮다느니 어쩌구, 하며 이런 것 못한다고 한다면 나는 가만 안 놔둘 것이다. 그런 연장과 도구가 없이 이만만 하게 나름 잘 버텨나가는 나를 향한 그런 행동에는 참을 인자를 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보이지 않는 대상에 엄포를 놓아 나를 다독거리고 나서 본격적인 오늘의 큰 일, 대업에 착수한다. 하다가 만일의 경우, 일을 그르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목수를 부른다하더라도, 나는 이미 그 실패에 대한 당연함을 선포해놓았으니 내 스스로의 자괴감은 덜 할 것이다 

자, 우선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제목을 붙이자. 그래야 작업 중 누가 물어오면 지금 무슨,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하니까. 잔디 마당 입구 목재 계단 세 개 중 상단 두 개 개보수 작업 중. 헐!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에 이렇게 긴 제목을 달아야하는가? 상당이 어려운 독일어 의학용어 같다. 줄여보자. 마당 쪽 목재 계단 두 단 보수 중. 아직도 길다. 더 줄여보자. 나무 계단 보수 중. 더 줄여보자. 일 하는 중., 일 중, 일 !! 아휴, 여기 저기 막 그냥 짜증이 난다. 휴일 낮에 일이라니.. 남들은 죄다 산으로 들로 해외로 정월 대보름 불붙은 지푸라기 부스러기처럼 천지사방 날아 흩어지는 데. 

좌우지당간 자, 제목이 정해졌으니 이제 일을 시작하자. 톱과 못 통을 가져와 옆에 놓고, 망치와 뺀치, 줄자, 작은 도끼는 허리에 찬 목수의 작업 밴드 구멍구멍마다에 꿰 넣어 차고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나무에 길이를 재고 표시를 할 연필이 없다. 아, 오늘은 처음부터 꼬인다. 허리에 두른 작업 공구걸이 밴드는 그냥 꿰차고 들어간다고 해도 신고 있는 장화는 벗어야 된다. 다행인 것은 나의 이 복장을 아직 아내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작업 복장을 아내가 보았다면 또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요? 거 웬, 숭례문 복원 공사하는 상목수보다 더 요란하게 주절주절 꿰찼네! 계단 한 칸 고치는 것 가지고...

이 감기약을 먹어야 어린이 대공원 데려간다고, 준비 다하고 문간에서 채근하는 엄마에게 할 수 없이 다가가 입을 벌리는 아이처럼, 마지못해 장화를 벗고 방으로 들어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나온다. 다시 역순으로 장화를 신고 허리에 찬 공구밴드를 더 조이고 일을 시작하려한다. 그 때 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아까 방에 들어갈 때 책상 위에 놓고 나왔나보다. 작업 장화를 또 벗어야한다. 이번에는 장갑까지 끼었는데. 돼지 선지 같은 삘거니 실리콘 처리가 된 면장갑을 벗으려니 손가락끼리 서로 붙어 옴짝거리기가 쉽지 않다. 급한 김에 손목 부위를 잡고 낄 때의 역방향으로 거꾸로 당겨 뒤집어 벗고 장화의 한 쪽 발뒤꿈치를 다른 쪽 발뒤꿈치로 압박해서 탈골시키고, 그 뒤꿈치 고무창을 한 손으로 잡아내려 겨우 겨우 장화를 벗고는 방으로 급히 들어가다가, 덜 열린 여닫이 문틀에 새끼발가락이 채여 자지러지게 아파왔다. 살 껍질이 강낭콩 심으려고 검정 PVC 덮어놓은 두둑위에 낸 호미 자국처럼 한 쪽이 덜 떨어져 덜렁대는 삼각형이다. 아파오는 고통을 참고 휴대전화를 거머쥐니 전화가 끊긴다. 전화기를 왼손으로 다시 잡고 역 크랭크 모양인 잠금 풀림패턴을 그어, 왔던 전화번호로 내가 전화를 건다. 아는 사람 같으면 나중에 또 전화 오겠지 하지만 저장이 안 된 번호라서 혹시 사업적으로 주문하는 내 고객일지도 몰라 서둘렀다. 조금 후 상대방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십니까. 새 시대, 새 양평을 이끌어 갈 새 일꾼, 새 정치 새 민주연합 새 아무개입니다... 실리콘 발라놓은 면장갑 끼고 벗기가, 30Cm 목 길이 작업 장화 신고 벗기가, 누구 주스 옆에 놓고 뻥튀기 먹기같이 쉬운 줄 알아, 이 양반아?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아휴 이걸 그냥... 발랑 벗겨진 살점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프다.

TV 얹힌 책상 서랍에서 손가락 밴드를 꺼내 발가락에 동여매고 다시 양말신고 장화신고 허리에 찬 목수 공구 밴드 한 번 조이고 작업에 착수하려한다. 그 때 아내가 안방에서 날 부른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빼줘요. 내일 사돈네 오신다는데 이 커튼이 새까맣게 이거 뭐야, 저기 위 고리 좀 빼서 줘요, 오늘 햇볕 날 때 다 빨게요.. 거실 것도 좀... 그리고 방마다 창틀 먼지 앉은 것 오늘 좀 각단지게 닦아내고, 대문 앞 잡초도 좀 뽑고... 아, 그딴 것 이따가 나중에 하고오 !! 안사돈도 오신다잖아요오 !!

나는 목수 공구 허리 밴드를 풀었다. 구멍마다 꿰인 공구도 빼서 바닥에 놓았다. 귀때기 위에 걸친 목수 연필도 내려놓았다. 잔디 마당 입구 목재 계단 세 개 중 상단 두 개 개보수 작업은 휴일 오늘도 이렇게 또 미루어졌다. 헐!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