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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인연 (1) 등록일 2016.06.08 14:18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73


 

인연 (1)                                                                                                                                   박복진

 

청바지의 무릎 위가 여러 갈래로 찢어진 젊은이가 마지막으로 내 옆 자리에 앉고 조금 후에 고속버스가 출발했다. 매우 화창한 토요일 이른 아침이다. 우리가 탄 차는 경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훨씬 전 부터 주말 나들이 차량에 섞여 서행을 했다. 나는 스마트 폰을 꺼내 이 메일을 검색하며 내용을 읽고 답하고, 그러고 나서 이어 폰을 통해 저장해놓은 경기 도당굿 동영상을 감상했다. 이것은 요즈음 내가 배우는 풍물가락인데 이렇게 훌륭한 우리 조상들의 가락이 왜 세계화 빛을 못 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찢어진 청바지에, 면의 품질이 좋아 보이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 젊은이도 서행하는 차량이 마음에 안 드는지, 스마트폰 화면에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우리 둘은 따로 따로, 단 한 마디의 말 걸음 없이 그런 자세로 거의 두 시간을 보냈다. 중간 휴게소에서 내려 볼일을 보고 다시 올라탈 때 내가 먼저 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타는 그 젊은이가 창문 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나는 통로에 서서 기다려주었다. 그 젊은이는 나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더니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우리 둘 사이는 스마트 폰 대신 대화가 자리 잡았다.

 

찢어진 청바지에 목 부분 칼라가 중국식으로 몽땅한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23살 이 젊은이 준호는 말했다. 무작정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제일 빨리 출발하는 차의 행선지를 물으니 전주라고해서 이 차에 탔다고 했다. 전주는 초행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나서 검색을 해보니 한옥 마을, 재래시장의 피순대 맛집 등이 나와 거기를 가볼 예정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그렇지만 나 같아도 엄청 해보고 싶은 전형적인 요즈음 젊은이들의 행동방식이다. 나는 그제서야 그 젊은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젊은이는 김구 선생이 썼던 것 같은 매우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인데 테 두께가 너무 얇아 행동에 조심이 많이 가야할 것 같았다. 피부가 아주 하얀 게 낮에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사무실이 근무처인가 보다. 손가락도 가늘고 길고 더군다나 키는 180이 넘어 이는 나의 즉각적인 측은지심을 유발시켰다. 나는 오늘 이 젊은이 준호에게 무엇을 해줘야 되는지 시키지도 않은 사명감을 느끼며 연약해 보이는 준호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지금 현재 전주로 내려가는 목적도 오늘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제한시간 16시간, 100km 울트라 마라톤 행사 때문이라는 것, 혹시 관심이 있으면 그 대회 출발지에 같이 가자고 하고, 그 이후에도 내 일정대로 나랑 같이 움직여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전주 터미널에 마중 나올 친구 권시인에게 문자를 보내 예상하지 않았던 동행이 한 명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좋다고 금방 회신이 왔다. 우리가 묵을 자기 별장까지 같이 와도 좋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생면부지, 전주행 고속버스 좌석번호 29와 일박이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세상에나, 무작정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탑승 가능한 제일 빠른 버스를 골라 타서 주말을 보내려하다니. 청춘, 가슴 어딘가에 있는 그 여백을 채우고 싶은 순수함이 나에게 까지 전해오는 듯 했다. 내가 보냈던 청춘의 아쉬움을 다 보상 받기라도 하는 양, 나는 처음 만난 23살 준호에게 퍼주고 또 퍼주고 싶었다. 나는 준호를 내 일정에 초대했고 준호는 응했다.

 

나는 준호에게 우선, 울트라 마라톤 100km 출발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국 각처에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는 불나방이 뜀꾼들. 극한의 고생문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들이 오늘 밤 내내 밤을 새워 100km를 달려 내일 아침 다시 이 자리에 올 사람이라는 것, 이들의 나이가 하나같이 어느 정도 되신 분들이라는 걸 보고 많이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해서 찢어진 청바지에 손가락이 가늘고 얼굴이 창백한 준호에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쿵쾅! 쿵쾅하게 해주고 싶었다. 준호를 내가 알고 있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전형이라 여기고 나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으로 머뭇거리는 나약한 젊은이들. 가다가 고꾸라질까봐 도전을 못하는 연약함에 싸인 청춘에 가라! 그냥 가보라! 하고 불을 확! 댕겨주고 싶었다.

 

준호는 보았다. 삶이 반드시 안전한 것 위주로 펼쳐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 이렇게 극한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며 즐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준호의 표정에서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반응이 계속해서 나왔다. 16시간 쉼없는 마라톤. 내 돈으로 참가비를 내고서 밤을 새워가면서 고통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 절대로 휘익! 지나가는 TV 화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장에서의 뜨겁게 분출되는 감동. 준호는 감동하고 있었다.

 

젊음아, 웅크리고 쪼그라든 젊음아! 현관문을 나서면 지갑을 놓고 왔나 불안하고, 휴대전화를 가지고 왔나 더듬거리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몇 번 버스 타고 거기 가야하느냐고 물어야하고, 몇 시까지 들어오라고 하신 말씀에 귀가 시간을 맞춰야하는 가여운 젊음아. 교무실 왕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 운동장 마른 땅에 부어가며 세계 지도를 그려볼 수는 없을까? 쏟은 물이 경계되어 그려진 세계 지도 위를 두 발로 밟고서 나는 여기를 가서 볼 거야, 나는 여기에 가서 살아볼 거야, 나는 여기에서 여기까지 한 번 뛰어볼 거야! 라는 야망을 가져볼 수는 없겠니? 그러자니 우선 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서해에서 동해까지 한반도를 가로질러 한 번 뛰어볼 거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달려볼 거야, 라는 생각을 가져볼 수는 없겠니?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이 말갈기 휘날리며 거침없이 내달렸던 북쪽의 광야 바이칼 호수에서 하늘 향해 두 손 한 번 번쩍 들어 포효를 내뱉어볼 수는 없겠니?

 

내빈 축사의 순서로 세계 울트라 마라토너 연맹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표 자격으로 나에게 건네진 마이크를 들고 나는 짧게 말했다. 오늘은 영어는 생략하고 한국어로만 말했다. 준호와 같은 요즈음 젊은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낮으나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울트라 동지 여러분! 오늘은 뛰기 좋은 날입니다.

 

그리고 단상을 내려와 우리 셋은 권시인의 별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 고속버스 옆자리 승객인 준호에게 감동, 2막을 안겨주려고, 우리 둘은 오늘 작심을 하고 차를 몰았다.

 

춘포

박복진

( 대한민국 뜀꾼 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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