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미루어지다 오늘은 작심을 하고 달라붙어 이 일을 해치워야겠다. 이곳 시골에 살면서 배워지는 게 느리게, 미루어가며 사는 현명함이라지만 이 일은 너무나도 많이 미루어졌다. 잔디 마당에서 데크로 올라오는 목재 계단 2단이 자꾸 밑으로 가라앉아 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발바닥으로부터의 감촉이 매우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의 이용에 의한 자연 침하와 계단의 안 부분이 흙과 닿아 썩어서 받침 역할을 못 해주고 있는, 이걸 수리해야겠다. 아니 이걸 빨리 어떻게 해놓으라고 하는 오래된 아내의 령을 오늘은 수행해드려야겠다. 일상에서 틈틈이 모아놓은 각목들이 있는 창고로 가서 마땅한 사이즈의 재목을 찾았다. 나의 경험으로 보아 딱 맞는 사이즈가 아니면, 이 정도 두께의 나무를 자르는데 꽤나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될수록 톱질이 필요 없는 사이즈의 나무들을 골랐다. 톱질은 시작하고 나서 몇 번 하면 금방 힘이 든다. 하던 톱질을 멈추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시작하면 금방 싫증이 나며 어떨 적에는 신세타령까지 나온다. 아파트에 살 때 같으면 구내전화 한 통화면 되는데, 무슨 잘못된 바람을 안고 나자빠져서 여기 시골까지 굴러오게 되었나, 하는 신세타령이다.
주섬주섬 재목들을 들어 가슴에 안고 창고를 나와 데크 계단 앞 잔디 마당에 우장장창 내려놓았다. 이 화창한 봄날에 이런 일로 시간을 보내다니, 내가 알기로 이 동네에 사는 은혜 아빠는 이런 일을 참 잘한다. 잘하는 것이 나보다 똑똑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 분은 관련 연장이 충분히 있기에 잘 할 뿐이다. 전기톱도 있고, 작업대도 있고, 칼이 안 들면 쉬이이잉! 소리 내며 날을 가는 칼갈이 모터도 있고. 만약 누가 나보고 도구사용 지능지수 어쩌구, 하며 이런 것 못한다고 한다면 나는 가만 안 놔둘 것이다. 그런 연장과 도구가 없이 이만만 하게 나름 잘 버텨나가는 나를 향한 그런 행동에는 참을 인자를 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보이지 않는 대상에 엄포를 놓아 나를 다독거리고 나서 본격적인 오늘의 큰 일, 대업에 착수한다. 하다가 만일의 경우, 일을 그르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목수를 부른다하더라도, 나는 이미 그 실패에 대한 당연함을 선포해놓았으니 내 스스로의 자괴감은 덜 할 것이다 자, 우선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제목을 붙이자. 그래야 작업 중 누가 물어오면 지금 무슨,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하니까. 잔디 마당 입구 목재 계단 세 개 중 상단 두 개 개보수 작업 중. 헐!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이 이렇게 긴 제목을 달아야하는가? 상당이 어려운 독일어 의학용어 같다. 줄여보자. 마당 쪽 목재 계단 두 단 보수 중. 아직도 길다. 더 줄여보자. 나무 계단 보수 중. 더 줄여보자. 일 하는 중., 일 중, 일 !! 아휴, 여기 저기 막 그냥 짜증이 난다. 일이라니.. 이 좋은 계절의 여왕 5월 하고도 첫 주에. 남들은 죄다 산으로 들로 해외로 정월 대보름 불붙은 지푸라기 부스러기처럼 천지사방 날아 흩어지는 데. 좌우지당간 자, 제목이 정해졌으니 이제 일을 시작하자. 톱과 못 통을 가져와 옆에 놓고, 망치와 뺀치, 줄자, 작은 도끼는 허리에 찬 목수의 작업 밴드 구멍구멍마다에 꿰 넣어 차고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나무에 길이를 재고 표시를 할 연필이 없다. 신었던 양말을 한 번 더 신고 나서 세탁하려고, 바깥에서 벗어 놨다 신은 양말은 실내에 다시 들어가기가 주저된다. 벗어야 된다. 허리에 두른 작업 공구걸이 밴드는 그냥 꿰차고 들어간다고 해도 신고 있는 장화는 벗어야 된다. 아, 오늘은 처음부터 꼬인다. 다행인 것은 나의 이 복장을 아직 아내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작업 복장을 아내가 보았다면 또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요? 거 웬, 숭례문 복원 공사하는 상목수보다 더 요란하게 주절주절 꿰찼네! 계단 한 칸 고치는 것 가지고... 이 감기약을 먹어야 어린이 대공원 데려간다고, 준비 다하고 문간에서 채근하는 엄마에게 할 수 없이 다가가 입을 벌리는 아이처럼, 마지못해 장화를 벗고, 양말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나온다. 다시 역순으로 양말을 신고 장화를 신고 허리에 찬 공구밴드를 더 조이고 일을 시작하려한다. 그 때 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아까 방에 들어갈 때 책상 위에 놓고 나왔나보다. 작업 장화를 또 벗어야한다. 이번에는 장갑까지 끼었는데. 돼지 선지 같은 삘거니 실리콘 처리가 된 면장갑을 벗으려니 손가락끼리 서로 붙어 옴짝거리기가 쉽지 않다. 급한 김에 손목 부위를 잡고 낄 때의 역방향으로 거꾸로 당겨 뒤집어 벗고 장화의 한 쪽 발뒤꿈치를 다른 쪽 발뒤꿈치로 압박해서 탈골시키고, 그 뒤꿈치 고무창을 한 손으로 잡아내려 겨우 겨우 장화를 벗고는 방으로 급히 들어가다가, 덜 열린 여닫이 문틀에 새끼발가락이 채여 자지러지게 아파왔다. 살 껍질이 강낭콩 심으려고 검정 PVC 덮어놓은 두둑위에 낸 호미 자국처럼 한 쪽이 덜 떨어져 덜렁대는 삼각형이다. 아파오는 고통을 참고 휴대전화를 거머쥐고 전파 파장 원 속에 갇힌 전화기 액정 그림을 겨우 꺼내니 전화가 끊긴다. 전화기를 왼손으로 다시 잡고 역 크랭크 모양인 잠금 풀림패턴을 그어, 왔던 전화번호로 내가 전화를 건다. 아는 사람 같으면 나중에 또 전화 오겠지 하지만 저장이 안 된 번호라서 혹시 사업적으로 주문하는 내 고객일지도 몰라 서둘렀다. 조금 후 상대방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십니까. 새 시대, 새 양평을 이끌어 갈 새 일꾼, 새 정치 새 민주연합 새 아무개입니다... 실리콘 발라놓은 면장갑 끼고 벗기가, 30Cm 목 길이 작업 장화 신고 벗기가, 뉘 집 누구 주스 옆에 놓고 뻥튀기 먹기같이 쉬운 줄 알아, 이 양반아?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아휴 이걸 그냥, 여기 저기 막 그냥... 발랑 벗겨진 살점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프다. TV 얹힌 책상 서랍에서 손가락 밴드를 꺼내 발가락에 동여매고 다시 양말신고 장화신고 허리에 찬 목수 공구 밴드 한 번 조이고 작업에 착수하려한다. 그 때 아내가 안방에서 날 부른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빼줘요. 내일 사돈네 오신다는데 이 커튼이 새까맣게 이거 뭐야, 저기 위 고리 좀 빼서 줘요, 오늘 햇볕 날 때 다 빨게요.. 거실 것도 좀... 그리고 방마다 창틀 먼지 앉은 것 오늘 좀 각단지게 닦아내고, 대문 앞 잡초도 좀 뽑고... 아, 그딴 것 이따가 나중에 하고오 !! 안사돈도 오신다잖아요오 !! 나는 목수 공구 허리 밴드를 풀었다. 구멍마다 꿰인 공구도 빼서 바닥에 놓았다. 귀때기 위에 걸친 목수 연필도 내려놓았다. 잔디 마당 입구 목재 계단 세 개 중 상단 두 개 개보수 작업은 오늘도 이렇게 또 미루어졌다. 헐!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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