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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도로에 누운 울트라 마라토너 등록일 2016.09.28 04:30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90



도로에 누운 울트라 마라토너

                                                               

 

갓길이 없는 왕복 2차로 길바닥, 개 한 마리 비켜설 정도의 공간에 내 몸을 눕혔다.

오늘이 달리기 3일째 마지막 날이다. 3,000m 이상의 고산준봉이 200개가 넘는다는 대만의 허리를 서해에서 동해로

가로지르는 대만횡단 울트라 마라톤 246km. 오늘은 대만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200m 고지를 넘어가는 도로를 달리는 날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르막, 내리막길의 연속, 내 허리가 우측으로 5도 정도 기울어 한 뜀, 한 뜀에 허리가 바스러지는 것 같다.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낙석 위험으로 모든 주자가 의무적으로 머리에 헬멧을 쓰고 달려야만 하는 아주 고위험 울트라 마라톤대회다. 누운 바로 옆은 천애의 절벽, 거의 수직각이다. 자칫 가드레일을 넘어가면 바닥의 계곡에 떨어지는 데만 해도 반나절은 걸릴 것 같다.


정말로 지쳤다. 허리가 너무 아파 땅바닥에 누우니 머리에 쓰고 있던 헬멧이 걸그적거린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천길 낭떠러지 수직 계곡 넘어 또 다른 산의 위용이 내 오른 쪽 눈에 아스팔트 바닥과 수직으로 가득 들어왔다. 달리는 것 말고 보는 것에 대한 피로도도 가중된다. 굽은 허리의 통증이 사르르르 이미 크게 한 모금 마신 커피 잔 속의 마지막 휘핑크림처럼 느릿느릿 내 몸에 퍼지며 조금씩 완화돼간다. 차가운 땅바닥이지만 누운 자세가 주는 편안함은 그걸 계속하고픈 단순 욕망으로, 지금 여기까지 200 Km 달려오는 동안 숨어있었던 달콤한 자포자기 유혹이 서서히 발동, 날름날름 혀로 나를 핥기 시작한다.


신경이 무딘 둔부에서부터 점차 치고 올라와 방향을 바꾸어 복부로 건너와서는 가슴과 어깨와 턱밑을 핥기 시작한다. 그러자 내가 그만 두어야 할,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어야 할 매우 지당한 이유가 장마에 갇혔던 논배미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밀려 터져 나왔다.


그래 고만 뛰자. 이만만 해도 잘 한 것 아닌가? 나 말고 한국인 참가자 5 명 전원이 이미 중도에서 접었다고 하지 않은가? 오면서 한국인 참가자 중 마지막 주자라고 힘내라! 힘내라! 짜이유, 짜이유, 얼마나 외쳐주던가? 내가 뭐가 잘나서 여기서 더 나가려 바둥거릴 것인가? 완주하고 허리 삐뚤어져 지팡이 짚고 돌아다니면, 그렇잖아도 나이 들어가며 추해지는 데 얼마나 더 보기 싫게 될 것인가? 애기들은 울어도 예쁘지만, 나이든 사람 웃으면 더 보기 싫다는데, 허리까지 옆으로 기울어져 슈퍼마켓의 한쪽 바퀴 고장 난 카트 밀고 갈 때처럼 옆으로 삐딱하게 걸어 다니면 얼마나 꼴 보기 싫어질까? 그런 자세로 그럴듯한 식당에 들어가면 입구 안내자가 나에게 보여줄 동정어린 눈길, 저래가지고 집구석에서 해주는 밥이나 처먹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외출을 하는가? 라는 시선. 정말 싫어지겠지. 그래 그만 두자. 여기 이대로 누워 있다가 대회 조직위원회 차량이 지나가면 세우고 손을 들어 깨끗하게 중포, 중도 포기를 선언하자., 한국 사나이답게, 절대로 구질구질하게 보이지 않게,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꼿꼿하게 일어나, 강풍과 땀과 정상의 강우로 구겨진 배번호 304번 박복진을 두 손가락을 다리미삼아 쭉쭉 펴서 내 자존심을 세우자. 배낭의 허리 띠 아래로 구겨져 들어간 셔츠도 밑으로 쭉 당겨서 마네킹에 입힌 베네통 광고 셔츠같이 우아하게 선을 살려 내 자존을 삼자


등의 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양 둔부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수분은 증발하고 소금 결정체만 남아, 달리며 비벼대는 허벅다리를 파고들어서 고추장 푸고 난 주걱처럼 발갛게 된 내 허벅지 안쪽. 지독하게도 화끈거리며 쓰라리다. 그걸 방지하려고 아내에게 헌 팬티스타킹을 얻어, 무릎 언저리 아래는 잘라내고 위만 입었지만 소용이 없다. 너무나 긴 시간, 너무나 먼 거리를 달려왔다. , 추위가 내 몸에 다가와 앉는다. 조금 움직여 쫒아보지만 금방 또 온다. 눈도 깜박여 자체 에너지를 내보지만 소용이 없다. 추위가 또 온다. 나락에 접근하지 말라고 장대로 후려쳐보지만 두 눈 껌벅이며 또 금방 나락 멍석으로 군침 삼키며 다가오는 시골 마당의 돌 장닭같이, 쫒으면 잊고 또 오고 쫒으면 잊고 또 온다. 땀에 절어 소금기 버석버석한 볼따구니에도 냉기가 앉는가 싶더니 이내 목뒤로, 등짝으로 금방 영역을 넓혀간다. 춥다. 한기가 든다. 울트라 마라톤으로 한밤, 그것도 해발 3,000m 이상 급 고산을 달릴 때 제일 무서운 게 저체온증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남자가 죽을 때는 마지막으로 종족보존의 본능이 살아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누운 자세에서 남성이 일어서는 것 같다. 영상 23도 바깥기온에서, 너무 굽은 길을 많이 달려 허리가 휘어버린 지금, 그래서 차가운 도로의 흰색 실선 위에 내동댕이쳐대듯 누운 이 자세에서 남성이 살아나다니.. 일 밀리미터 공간도 없이 꽉 쪼인 초강력 팬티 스타킹 아래에서 남성이 살아나다니, 정말 죽으려나보다. 이래선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계속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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