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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 등록일 2016.09.28 04:26
글쓴이 박복진 조회 1746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

                                                                     

 

아직 바깥은 캄캄하다. 호텔 객실의 커튼을 살짝 밀치고 도시의 지붕들을 좌에서 우로 훑어본다. 아프리카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AD711 년에 이미 아랍의 침입을 받았던 곳, 그래서 아랍 문명의 잔존이 많은 이곳, 어제 낮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쫓기듯 훑고 지나온 알 함부라 궁전을 나는 다시 보아야겠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나 혼자서 십 수 세기 이전의 그때로 돌아가 이 새벽에 나 홀로 그 궁에 다시 가서 보리라. 내가 아는 이 음악, 알 함부라 궁전의 추억. 맨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심금을 울려주던 이 음악. 그 음악가는 도대체 어떤 감정이 있었기에 이 궁을 한 번 보고 평생을 못 잊어하며 이 같은 불후의 명곡을 남겼을까 ?

 

미리 준비해서 바닥에 펼쳐 놓고 잠자리에 들었던 달리기 옷가지를 망설임 없이 순서대로 집어 입는다. 간단하다. 달리기 팬티. 셔츠. 달리기 양말, 운동화. 목뒤까지 가리는 사막용 모자, 하얀 장갑, 물통을 넣어 허리에 두르는 주머니. 이게 전부다. 아내가 깰세라 조심조심 까치발로 방문을 나선다.

 

당직으로 밤을 꼬박 새운 호텔 접수부의 무어 혼혈족 남자에게 시내 지도 한 장 달랑 건네받고 만일을 위해 호텔 명함 한 장을 물통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호텔문을 밀치고 나와 저 멀리, 호텔 내 방에서 바라보았던 산등성이 위의 알 함부라 궁을 향해 뜀질을 시작한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곧장 산정을 향해 올라가는 오르막길이라 출발부터 만만치가 않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거리, 화산재 속의 따개비 화석처럼 미동이 없다. 한낮에 45도 이상으로 달궈진 거리는 아직도 그 열기가 내 운동화의 발밑에 달라붙을 것만 같다.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 소도시. 천년 고도의 아침을 나는 달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오른 언덕, 이제 궁으로 이르는 산길이다. 그러나 느낌이 이상하다. 달리기에만 정신이 팔려 길의 표지판을 지나쳤나보다.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일단 짐작된 길로 무작정 다시 뛰다가 새벽 순찰중인 여자 경찰을 만났다. 흑발에 금발가닥이 몇 개 드리워진, 얼굴은 조막만하고, 허리는 머슴 밥사발 둘레만한, 그러면서도 엉덩이는 비율에 안 맞게 엄청 큰 그 순찰경찰은, 진한 녹색 가로수에 어울리는 사막의 모래 색 연한 베이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길을 물었다. 그녀의 서툰 영어와 나의 서툰 스페인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적지를 가리키는 그녀의 손끝을 바라봐야 할 나의 눈은 목적에 안 맞는 속셈으로 자꾸만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 똥그란 눈동자만 바라본다. 정말 예쁜 눈이다. 무어족, 켈트족, 이베로족 등 모든 잡탕이 빚어낸 아름다움이다. 감정을 숨길 수만 있다면 더 오랫동안 옆에서 바라보고픈 아름다운 눈이었다. 언제까지라도 바라볼 수 있게 허락만 해준다면 내 재산의 반을 줘도 아깝지 않을 눈이었다. 무안함으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손끝 대신 눈만 바라본 결과가 금방 다시 나타났다. 또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며 엉큼함의 대가를 다 치른 후에야 내가 찾는 궁 입구가 뿌옇게 전방에서 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알 함부라 궁! 내부의 각방에 들어가는 문들은 모두 철통같이 잠겨 있어 나의 진입을 허하지 않았으나 나는 궁 전체를 요리조리 혼자 둘러보며, 13세기에 지어진 이 궁의 역사 속으로 나를 서서히 잠입시킬 수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서로 간 목숨을 건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다는 36명이나 되는 왕비들의 방, 지금 당장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호화로운 욕실들... 왕명을 거역한 죄인의 목을 메달아 지금도 바닥에 선혈 자국이 있는 처형실, 호화로움의 극치인 천장 내부 설계, 궁 내부 한가운데 자리한 직사각형 정원의 못, 헤네랄리페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 옛날, 무지와 무관심으로 세월에 묻히어 황량한 잡초 속에서 잠자던, 지나가는 거지들의 잠자리가 되었던 이곳을 발견하여 그 진가를 세계에 알렸던 소설가, 어빙 !! 그를 위해 그의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그의 집필을 후원해 주어, 지금도 수백만 관광객이 그의 이름을 찾아 이곳을 방문하게 한 이곳 행정가의 이름은 또 누구던가 ?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음을 떠올려 본다. 눈을 뜨고 궁의 구석을 다시 응시한다. 기타와 만돌린의 기가 막히는 화음! 제목을 아지 못하더라도 쉬이 빨려 들어가는 아련한 추억 같은 멜로디다. 원어를 직역하면, " 나의 안부를 알 함부라에 전해다오 ! " 이니 작곡자는 그 음악을 만드는 그 순간에 알 함부라에 있질 않았나 보다. 연인은 떨어져 있을 때 그 보고픔이 더욱 간절한 법인가? 그 음악의 작곡자는 이곳을 떠나와서야 이곳의 진가를 알았다는 뜻일까 ? 또다시 눈을 감는다. 차도르를 걸친 궁녀가 뇌쇄적인 육체를 흐느적거리며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고, 반라의 미희들 속에서 만돌린의 음에 취한 절대 권력의 왕은 먹던 사과를 던져 오늘 밤 육욕의 대상을 점지한다. 다시 눈을 뜬다. 왕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설 수 없는 금남의 방을 훔쳐보다 처형된 호기심 많은 남자의 잘린 모가지가 바로 내 발아래서 나동그라진다. 무서워 내 손이 내 목으로 갔다. 그리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는 아내의 질책이 떠올랐다. 어서 호텔로 돌아가야지.

 

옥중 춘향이의 서찰을 든 방자처럼 서둘러 궁을 빠져 나와 내리 달렸다. 미로 같은 길이 문제였다. 또 헷갈렸다. 아까 그 금남의 방에서 잘린 모가지가 자꾸 발에 걸린다. 그때 나 같은 마라톤 복장을 한 40대 중반의 마라토너 셋을 만났다. 셔츠에 박힌 각자의 마라톤 로고를 보고 금방 동지애를 느꼈다. 그들은 나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여주었고 가던 방향을 바꾸어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호텔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며, 10여 분 동안 이곳 그라나다 주민들에게도 잘 안 알려진 알 바이신 지구의 비경도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 대한 나의 추억은 아름다운 알 함부라 궁과 감미로운 그 음악에 생판 모르는 현지 마라톤 친구의 우정까지 더 얹혀지게 되었다.

나는 국내건 국외건 현지에서의 아침 달리기를 사랑한다. 달리기 중 오늘 같은 평범치 않은 일은 언제고 생기며, 그 사건들은 곧바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석으로 둔갑되어, 귀국 후 나의 달리기 일지 한 낱장을 장식한다. 그리고 먼 훗날 나의 기억이 가물거릴 때 거기서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여행지 마다 마다에서 달리기를 빼먹지 못한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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