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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그 신사 등록일 2016.09.28 04:23
글쓴이 박복진 조회 1652





그 신사.


 

5호선 지하철 고덕 역에서 내가 그 신사를 본 것은 전부 합해서 4-5분 정도 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그 날은 주의 한 가운데 수요일이었고 시각은 오후 3시 정도였다. 때가 때인지라 출근도 아닌, 퇴근도 아닌 매우 한가한 오후 중간 대 시간이어서, 출근하지 않는 일반 주부들은 인근 백화점에 가서 물건 몇 가지, 혹은 지하층에서 찬거리 몇 가지 사고 꼭대기 층의 문화 마당을 기웃거리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매우 평온하고 안정적인 서울 변두리 움직임 시간대이었다. 고덕 역에 지하철이 멈추자 8 량 전동차 매 칸마다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승객만 하차하고 정거장 플랫폼은 금방 다시 휑해졌다. 인근 병원에 병문안을 가는 나도 그 변두리 지하철 정거장의 몇 안 되는 하차 승객 중 한 명이었다. 서두름이 하나도 안 보이는 승객들은 모두가 가만가만, 엄청나게 잘 교육받은 군 훈련소 장정들처럼 앞뒤 줄을 잘 서서 개찰구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때 그 신사가 내 앞에 가고 있었다.

 

그 신사는 한 눈에 70대 중반처럼 보였다. 키가 180 cm 는 족히 됨직한 큰 키였다. 그래서 내 눈에 확 들어왔나 보다. 키만 크다면야 나도 그냥 지나쳤을 것인데, 이 신사분의 복장과 걷는 자세 등 몸 전체에서 풍기는 귀품이 단박에 내 시선을 빼앗았다. 미모로 일류 배우가 된 사람을 옆에서 봤는데 정말로 광채가 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신사분이 바로 그런 사람인가보다. 난 그 분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관심을 가지고 그 분의 뒤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 앞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신발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품격 있는 밤색 가죽 레저 구두였다. 껍질을 벗기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꺼내 한참이 지난 밤 처럼 아주 여린 브라운 색이었지만 그 가죽 두께는 적어도 2.6mm 는 됨직한 아주 고급 가죽 신발이었다. 만든 공법도 인디언 모카신이라고 하는, 흔히 말해 랜드로버 타입의 손 꿰매기 신발 윗부분과 정통 웰트가 들어가는 아래 신발 창 구조로 고급 공정을 거친 신발이었다. 그 분의 신발 고르는 안목을 높이 사야 할 이유다. 바지는 아주 가느다란 골이 있는 코드로이 원단의 실용적인 바지였는데, 이 바지가 더 고급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 원단의 색상이었다. 신고 있는 가죽 신발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 신발의 가죽 색상보다 약 10% 정도 더 연해서 차라리 베이지에 가까운 밤색이라고 봐야겠다. 즉 같은 색감이지만 아래 신발보다 10% 정도 더 연한 바지가 그 위에 걸쳐 있으니 매우 안정적인 편안함을 주었다. 여기에 또 그 분이 걸친 코트가 압권이다. 원단이 장터의 플라스틱 옷걸이에 걸쳐져있는 값싼 원단이 아니라, 서울 소공동 롯데 호텔 앞 양복점 유리창 안에 있는 전시용 코트의 원단같이 아주 고급으로 보였다. 이 코트의 색상은 밑의 신발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며, 구두의 연한 밤색과 바지의 연한 베이지 색도 차이인 10%를 더 연하게 뽑은, 극히 엄정하게 색도 공식을 적용시킨 색상 같았다. 젊었을 때 색상이나 패션 계통에 계셨던 것일까?

 

그 분의 뒤를 따라 올라가는 중이었기에 그 분의 앞모습은 하나도 보지 못했지만, 여기까지의 복장만으로도 그 분의 차림새에서 귀태가 났다. 나는 그 분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나의 관찰을 더 이어갔다. 그 분의 어깨는 좌로 약간 기울어진 곡선이었다. 굽었다고 해서 절대로 나이 듦이나 삶의 무게가 그렇기에 그렇다는 생각은 안 났다. 오히려 그 굽은 어깨선이 세상을 향해, 나는 이제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깨우칠 것이 없으니 나에게 설명하려들지 마시오, 라는 친절한 설명문 같았다. 참 편하게 보였다.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더 결정적인 것이, 그 분의 모자가 다 덮지 못한 그 분의 흰머리였다. 중절모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 새어나온 그 분의 백발도 역시 10% 공식이 적용된 것 같았다. 부드럽고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백발에 10% 정도의 흑발이 섞였는데 그 검은 머리칼은 뭉텅뭉텅 무질서로 난 검은 머리가 아닌, 아주 골고루 정확하게 식재된 국립종묘장의 묘목 같았다. 누구나가 보면, 나도 늙으면 저렇게 귀태나게 흰머리가 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날 그런 흰머리와 검은 머리의 썩 잘 어울리는 조합, 안락함, 여유로움, 고결함의 구현이었다.

 

그 분의 백발 위에 약간의 무게감으로 얹혀진 중절모는 지금까지 내가 관찰한 그 분 외모의 완결판이었다. 영국 왕실에서 결코 자주 사용되지 않는 연한 회색이 어쩌다 여왕의 모자에 적용되었다면, 지금 바로 저 색깔이 저 신사의 중절모 색깔일 것이다. 의심할 것 없이 이 중절모는 그 분의 외모를 한층 더 고결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재질 자체도 아주 최고급으로 보였다. 일 년 사시사철 비가 고르게 내려 고르게 자란 풀을 먹고 아주 곱게 자란 양의 털을 깎아 세계 일류 제모사가 작심하고 만든, 한정 생산 제품은 아닌지? 구입 경로도 그냥 백화점을 돌다 충동으로 구매한 것이 아니고, 아마 틀림없이 영국의 옥스포드 스트리트 해롯 백화점 옆 세계 최고의 고급 모자점에 의뢰해서, 3 개월이 지난 성탄일 직전에 구입했을 것 같은 아주 특별하게 좋아 보이는 중절모였다.

 

맨 아래 신발의 연한 밤색부터 위로 올라오며 10%씩 색도가 여리어져서 이제 중절모에 이르러서는 완벽하게 우아한 베이지로 끝난, 그 분 외모 전체에서 풍기는 안정감과 삶의 농익음은 좌, 우 빗변이 정확하게 그어진, 매우 안정적인 이등변 삼각형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 드러난 매무새와 그 분의 걸음걸이, 어깨의 곡선, 백발과 중절모만으로 처음 본 사람의 시선을 빼앗다니. 아니 그런 자잘한 항목에 내가 이렇게 현혹되다니.. 10 년 후 나도 그 신사처럼 외모만으로 남들에게서 고품격 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집 안이나 집 밖에서 아무런 구속, 고민 없이 참 평화를 누리며 산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까?

 

개찰구를 빠져나와 내가 나의 출구번호를 확인하려는 사이 그 신사 분은 화장실 쪽 역 구내 우측으로 갔다. 내가 가는 방향과 일치해서 그 앞을 지나면서 보니 그 신사는 화장실 입구에서 가만히 일렬 줄을 서고 있었다. 일을 보는 소변기 앞의 앞 순서 사람의 바로 등 뒤가 아니고, 두 어 걸음 떨어진 입구에서 일렬 대기 예절을 갖추며 조용히 자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 신사 분을 보며 역시나..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나는 수요일 오후 3 시 지하철 5 호선 고덕 역을 빠져나왔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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