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수필



Home > Introduction > 마라톤수필

마라톤수필

제목 [기본] 그녀는 예뻤다 등록일 2016.09.28 04:21
글쓴이 박복진 조회 1683




그녀는 예뻤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제, 나는 이곳 양평 시골 길 용담리, 대석리, 세월리, 병산리, 송학리 리, , 리자로 끝나는 매우 한적한 지방 도로를, 나의 달리기 동반자 파비라는 이름의 내 애견과 함께 달리고 있었습니다. 파비의 조상은 시베리아에서 눈썰매를 끌던 개라, 달리기를 매우 좋아해서 제 달리기 동반자로는 정말 제격입니다. 다만 몸의 털이 밍크처럼 촘촘하고 길어, 이렇듯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면 외모가 굉장히 추해져 불쌍해 보입니다. 더욱이 태생이 추운 그곳인지라 더위에는 약해, 조금만 달려도 혀가 안 뿌리까지 그대로 다 나와 땅에 닿을 정도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측은지심이 절로 나게 됩니다.

 

우리가 달리는 길 곳곳은 요 며칠 사이 내린 폭우로 침수 되어 아스팔트 포장 도로지만 시뻘건 흙탕물이 범벅, 도로 갓길 표시 백색 실선을 모두 삼켜버렸습니다. 내리는 비는 지금도 폭우 수준으로, 겉옷으로 걸친 한반도 횡단 울트라 마라톤 글씨 새겨진 바람막이 비옷 때리는 소리가 마치 달군 후라이팬에 막 쏟아놓은 튀김 기름 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

나의 빼먹은 새벽 달리기 보충으로 지금 이렇게 철벅거리며 달리는 중입니다.

 

방수 배낭에, 그 위 비 커버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안에 검정 PVC로 돌돌 감싼 휴대전화기가 젖을까 걱정되어, 조금 전 버스 간이정류장 차양 막 안에서 배낭을 점검해보고 다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달리는 우리 뒤쪽에 무슨 기척이 느껴져 달리던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보니, 오래된 겨자색 경승용차 한 대가 우리 바로 뒤에서 막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엄청 세차게 내리는 비는 우리 둘의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만들어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는데 잠깐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정말 무섭게 내리는 비였습니다.

 

아마 조금 전부터 우리 뒤를 따라오며 뭐라고 한 모양이지만 나는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철벅 철벅 아스팔트 위 넘친 빗물 자막소리에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차 문의 유리창이 30cm 뿔 잣대 폭만큼 삐 조금 내려가더니 그 안에 젊은 여성 운전자 얼굴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머리 스타일이, 뒤는 어쨌는지 생각이 안 나 모르겠지만, 앞머리는 자로 긋고 자른 듯 반듯한, 클레오파트라 머리 스타일이었습니다. 이 한적한 지방도로에 앳된 여성분이, 이처럼 지독한 폭우에, 도로를 달리는 낯모르는 외간남자를 향해 말을 거는 지금, 무슨 쪼간인지는 모르나 대단한 결심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우선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더 솔직한 심정으로, 이 폭우에 짧은 반 타이츠, 가슴에는 태극기 선명한 한반도 횡단 점퍼차림의 저 자신이 이 여성 앞에 많이 우쭐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여성 운전자가 말을 안 걸었다면, 그리고 내가 먼저 이분을 만났다면 말이라도 한번 걸고 싶었을 사안이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서울에 머물고 있어 오후에나 오기 때문에 예쁘장한 처자에게 말 몇 마디 걸어보는 잠시의 선한 이탈도 시도해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곳 양평 지역으로 이사와 새로 둥지를 틀고, 나는 나처럼 매일 달리기를 하는 동네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화려하고 세련된, 엉덩이가 착 달라붙어 위로 치고 올라간 지금 나의 전문 달리기 복장을, 그런 나를 동네 어느 처자가 나 몰래 좋아했을 수도 있을 것이고요.

 

그 여성이 말했습니다. 말을 하려 삐 조금 열어놓은 유리창 사이로 비가 훅! 하고 들이치자 머리를 흠칫 차 안으로 거둬들이는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왼손을 교차해서 오른손으로 집어든 우산 끝을 유리창 밖으로 반쯤 내밀며 그 여성분이 말했습니다

 

우산 드려요? 조금 고장 났는데 쓰는 데는 괜찮은데..... ”

 

, 번쩍하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이 아름다운 여인! 길 가다가 만난, 비 맞고 철퍼덕 거리며 뛰어가는 행인에게 조건 없이 우산을 제공하려는 여심, 저 여성분은 도대체 어떤 가정에서 어떤 교육을, 어떻게 받고 자란 여성일까요? 아주 빠른 순간이었으나 나는 아주 커다란 기쁨이 내 온몸을 휘감아 도는 것을 느꼈습니다. 누구는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하고는 말도 나누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에게 베푼 낯모르는 분의 친절에 감동해보지 않은 자, 살지도 마라!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멈춰 서서 말을 나누려 고개를 숙이자 내 모자 위에 고였던 빗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안경알을 훑고 내려갔습니다. 손가락으로 이를 살짝 훔치어 시야가 확보되자 나는 이 아름다운 여성에게 큰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혹시라도 대화가 중단될까 봐, 그러면 내가 엄청나게 서운해지니까 쉼 없이 길게 이어서 말했습니다.

 

, 괜찮습니다. 나는 맨 날 이렇게 뛰니까 괜찮습니다. 마라톤을 하거든요. 지금 울트라 마라톤 장거리 연습 중이거든요. 이렇게 비와도 괜찮습니다. 벌써 다 젖었잖아요. 용담리에서 부터 뛰어서 지금 병산리 삼거리 거쳐 저기 남한강 마나스 미술관을 돌아 다시 가는 중입니다. , 괜찮습니다. 울트라 마라톤은 일부러 비 맞고도 뛰는 것입니다.... “

 

그러면서 나는 마나스 미술관을 발음할 때는 조금의 간격을 두었습니다. 돼지갈비 집 보다는 미술관을 거명해서 나의 존재를 이해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심고자 했었나 봅니다. 그러자 그 여성분은 말했습니다. 삐죽하게 창밖으로 내놓은 우산 앞부리를 거둬들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들이치는 비를 그냥 놔두며 말했습니다. 엄청나게 동물애호가임이 분명한 그녀의 앞머리가, 집으로 뛰어오는 길 내내 생각나며 내 귓가에 맴돈 그녀의 말은 이러했습니다. “ 개가 젖잖아요... 개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요... ”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다음글 | 그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