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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어떤 첫 만남 등록일 2016.09.28 04:50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41




어떤 첫 만남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발 워싱턴 행 델타항공 DL-1406 비행기가 서서히 워싱턴 상공으로 진입합니다. 비행기 기체 아래에 점점이 자동차의 전조등 행렬이 숲과 숲, 건물과 건물 사이를 느리게 꼬리 물고 기어가는 게 보입니다. 나락멍석에 접근하지 말라는 주인의 호통소리에 놀란 수탉처럼, 나는 꾸벅꾸벅 졸던 눈을 크게 위로 한 번 치켜뜨고 긴 호흡을 합니다. 이제 5분 후 나는 32년 만의 어떤 첫 만남을 위해 워싱턴 내셔날 공항에 내리게 됩니다. 까까머리 15살 때부터 이어져 온 어느 미국 소녀와의 32년 우정, 소위 펜으로만 사귀어온 펜팔을 만나게 됩니다. 비행기 날개 끝 아래로 링컨 기념관도 보이고, 야간 조명을 받아 더 우뚝한 조지 워싱턴 기념비도 보입니다.

 

   열다섯 살 나이에 미국 평화봉사단 영어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미국 소녀의 이름과 주소, 그 쪽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서울에 살고 있던 큰 형님 내외에게 새로 태어난 애기가 딸이냐, 아들이냐고 라고 묻던 엄마의 대필 편지가 전부였던 내 편지 놀음에, 이역만리 미국에 있는 생면부지 벽안의 소녀에게, 그것도 꼬부랑글씨로 펜팔 편지를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표 값은 또 오그라지게 비싸서, 편지를 써놓고 돈이 없어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암탉 꽁무니만 쳐다보며 계란을 학수고대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계란을 동네 점방에 갖다 팔아야 우표 한 장 살 돈이 나오니까요. 우체국도 멀어서 터덜터덜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5리나 걸어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했습니다. 요새 같은 딱풀도 없어서, 있다한들 돈 주고는 못 샀지만, 보리밥 알갱이를 손바닥에 쥐고 가서 우표 뒤에 꾹, 꾹 눌러 풀을 대신했는데, 보리알갱이 가운데 목수의 먹줄 튕김 자국 같은 검댕이는 우체국 직원 몰래 접수대 나무판자에 쓱싹 문질러 버려야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펜팔 인연이 5년 여 계속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양쪽 모두의 주소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내 입장으로 보면 군대복무 기간이 될 터이고 미국 소녀의 입장에서 보면 고향인 애리조나에서 학업을 위해 버지니아로 갔었던 게 이유였나 봅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 찾아보자! 나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어넣어주고, 외국어 공부에 대한 동기를 심어준 나의 까까머리 시절 친구이자 은인인 이 소녀를 찾아보자! 라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전해온, 가고 싶다던 버지니아의 대학교 이름을 기억해서, 그 대학교 동창회에 편지를 보내자 몇 달 후, 회신이 왔습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숙녀의 이름과 소재지를 찾았는데, 그 숙녀가 지금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연락처를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그 숙녀 분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낼테니 당신은 그 편지만 전달해 달라. 그 숙녀분이 회신을 하고 안 하고는 자신이 결정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와 이 숙녀분과의 32년 오랜 인연을 설명했습니다. 이 시대에 결코 흔하지 않은 사연이지요. 얼굴 한 번 안 보고 목소리 한 번 안 듣고 이어져온 편지 내왕입니다. 타자기로 친 것도 아니고 이 메일도 아닌 육필 편지로만 말입니다. 항공편지는 비싸서 선박 편으로만 보내고 받았던 사연들입니다. 적금하나 깨서 국제 전화를 걸어 목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렇게 글로만 보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참고 참아온 사연입니다. 믿었던 그대로 그 소녀에게서 회신 편지가 왔습니다. 자기도 무척이나 궁금해 했는데 주소를 몰라 못하고 있었다며, 그동안 학교 졸업이야기, 결혼 이야기, 자식들 넷 이야기 등등 육필 편지가 넉 장이나 되었습니다.

 

   자, 옛날에는 길게는 한 달, 짧게는 보름씩 걸리던 편지가 이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메일로 태평양을 건너가고 건너왔습니다. 이렇듯 목소리 한 번 안 듣고 32년을 지속되어온 우리 두 사람의 끈기어린 편지 친구를 요즈음 세대들은 무어라고 할까요? 못나고 고리타분하며 답답한 얼뜨기라고 놀릴까요? 그렇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단순 팔 다리 운동만으로 마라톤을 하는 우직함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흔치 않은 사연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비행기 바퀴의 둔탁한 착지 파열음이 들리고 엔진의 요란한 역 추진 굉음이 뒤따르더니 기체는 승객의 하기를 위해 공항 터미널로 접근해갔습니다. 옆자리 아내가 눈 깜박거림도 잊은 채 바깥을 응시하다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 속삭입니다. 만나면 뭐라고 말 할거에요, ?

 

   난 아내의 옆 볼 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비행기 바깥을 내다보며 조금 후 첫 대면에서 해야 할 첫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열 개도 더 넘게 준비해온 말, 무엇을 골라서 무슨 표정으로 어떻게, 호칭은 뭐라 하며 시선 처리는 어느 곳에? 오메! 30년 전에 받았던 유일한 반명함판 사진의 주인공, 긴 생머리의 호기심 많게 보였던 벽안의 십대 서양 소녀가 저기 저 곳에서 날 기다리다니.. 그리고 그런 그 소녀를 만나보기 위해 나는 아내를 데리고 이렇게 미국까지 날아오다니..

 

   내리는 승객들 전부가 서양 코쟁이들인데 우리만 동양인이어서 아마 그 소녀가 우리를 먼저 알아볼 것 같습니다. 지금껏 목소리 없는 편지 내왕만으로 이어져 온 긴 세월에 이제 마침표가 찍혀지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내가 만나기로 되어있는 당사자인 듯한, 파란 눈과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48살의 미국 중년 부인이 !’ 하고 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이 만남이 가져온 갑작스러움의 커다란 무게 때문에 나는 잠실 야구장의 야간 조명탑 조명등이 내 코앞에서 일시에 확! 하고 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전혀 생각이 안 났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시선은 어디에 두었는지. 악수를 했던가요? 포용하며 볼 키스를 했던가요?

 

   너무너무 극적인 영화 장면에서 대사를 빼버리고 롱 테이크, 느린 정지 그림만을 길게 보여주는 카메라 기법처럼, 느리게, 느리게 우리의 첫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페기 Peggy. 내 소년 시절에 나 이외의 세상을 알게 해주고, 미지의 서양세계로 날 끌어들여 한없이 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도움 주었던 고마운 14살짜리 편지 친구 그 소녀가 지금은 13녀의 엄마로서, 버지니아 주 주립 도서관 총책임자인 남편을 둔 아내로서, 환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아시아의 동쪽 끝 대한민국에서 날아온 소년, 나의 말을 예의 바르게 경청해주고 있었습니다. 내가 골랐던 가장 예의 바른 말, 그리고 지난 32년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고마워요, 페기 양!

 

“ Thanks very much indeed, Peggy ! "

 

 

 춘포

박복진

( faab 마라톤화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