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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비행기 일등석 탑승기 등록일 2016.09.28 04:49
글쓴이 박복진 조회 2020





비행기 일등석 탑승기

 

   타이 항공 TG628 비행기가 홍콩 공항의 교통체증 때문에 예정보다 15분 늦게 이륙하였으나 내 기분은 지금 최상이다. 귀국 길, 서울로 가는 비행기 탑승수속 때 38A 날개 위 창가 보통석 자리를 끊고 간 나에게 태국 항공 지상 여직원은 상냥하고 제법 정확한 발음의 영어로, " 손님, 혼자 여행하십니까? 괜찮으시면 일등석을 드릴까요? " 라고 말해서 나를 하마터면 졸도할 뻔 하게 만들었다. 내가 너무 기뻐, 내 두 눈의 흰 창이 가오리연만큼 커져 갈 때, 그 직원은 나에게서 보통석 탑승권을 날름 받아 그 자리에서 쭉 찢어버리고 일등석 탑승권을 새로 내주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행운으로 내 가슴은 꿍꽝꿍꽝, 나는 최대한 침착함으로 이렇게 가끔씩 일등석을 타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고 억지 태연함을 쥐어짜보았다. 지금까지 수 십 년 항공 출장 중 내 돈 주고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비행기 일등석 자리. 일등석 탑승권을 손에 쥔 나는 이미 만년 이코노미 그 옛날의 인생이 아니었다. 꾀죄죄한 삼등석 인생신분에서 단박에 수직상승, 두 어깨에 바람이 붕! 들어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구두 발자국 때문에 더렵혀진 보통석 탑승교의 융단을 우측으로 놔두고 나는 빨간 일등석 전용 융단을 밟으며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이 정말 유감이었다. 나를 알아 본 사람이 나 몰래 소문 좀 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 복진이, 생김새는 그래도 비행기는 맨 날 일등석만 탄다고. 지금 이 순간을 아내가 보았으면 좋겠는데. 멋진 남편! 지금 이 모습을 아들, 종화가 보았으면 좋겠는데. 멋진 아빠! 그리도 궁색으로 찌들어 불세 ( 전기세 ) 나간다고 전구 하나도 함부로 못 켜는 쫌씨 남편, 치약튜브도 마지막은 배를 갈라 혀로 핥아서 쓰고, 오징어도 구우면 오그라들어 작아진다고 그냥 먹는 구식 아빠가 비행기 일등석을 타다니..

 

   태국의 전통 의상을 입은 일등석 여승무원이 입구에서 나의 일등석 탑승권을 확인하더니 앞장서서 친절하게, 매우 세련된 몸놀림으로 내 좌석까지 안내해줬다. 짙은 곤색 바탕에 연한 보라색 땡땡이 무늬 점박이가 박혀있는 융단을 밟고 내 자리, 내 돈 주고는 절대로 못 앉아 볼 일등석 내 자리에, 나는 공연 끝난 발레리나가 무대 인사를 위해 재등장할 때처럼 새털같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가 앉았다.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가방에서 샤프연필을 꺼내어 내가 앉은 이 일등석 자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이 일등석 자리가 내가 그동안 탔던 보통석과 무엇이 다르냐하면, 우선 의자 팔걸이의 폭이, 들고 있는 샤프 연필 전체 길이에서, 나와 있는 꼭다리의 지우개 뚜껑을 뺀 길이만큼 넓어, 내 가는 팔의 팔걸이로는 너무 호사스럽다. 의자는 내 궁둥이 두 짝을 폭 감싸고도 남아 좌우로 호텔 베개를 하나씩 세워 놓아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고, 통로도 두 사람이 한꺼번에 비켜 지나갈 정도로 넓어, 뉴스위크지나 TV에서 대한항공 여승무원이 잠든 승객에게 담요 덮어주는 장면처럼 주변에 공간여유가 있다. 일등석 담당 여승무원은 내가 무얼 부탁하려고 부를 때마다, Sir! Sir! 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꼬박 꼬박 붙여주어 나는 그 재미에 소용도 없는 일에도 한 번 더 불러보기도 했다. 이곳 일등석의 여승무원 복장도 보통석과 달라, 아주 귀티 나는 금장 띠를 어깨에 두르고, 호출하면 봉사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는 표정이 절절 넘치는 미소가 얼굴 가득, 가까이 다가와 내 눈높이로 자기 두 눈을 갖다 대주며 특별한 고객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교육받은 짙은 애정을 숨김없이 다 표해준다. 자리는 발을 있는 그대로 다 뻗어도 남아돌고, 옆에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듯 한 마실 것들, 샴페인, 카둘라 ( 이것 먹어보니 갈리아노보다 덜 끈적거리고 향은 거의 똑같다 ), 적포도주, 백포도주 등등 온갖 고급스런 마실 것들이 찬장에 가지런히 나와의 눈 맞춤을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일등석 여승무원의 식사접대가 나의 눈길을 끄는데, 우선 무엇을 마실 건지 일일이 목록을 받아 적어간다. 그냥 있는 것 중 하나씩 떠안겨 주는 보통석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조금 있다가 내 앞 식탁에 정갈하게 세탁되어 잘 다림이질 된 식탁보를 깔아주더니, 식사 전에 음료수 주문 받아 간 그대로 갖다 주는데, 나는 처음에는 보통석 습성대로 진토닉을 주문했다가 다시 샴페인으로 바꾸어 주문했다. 샴페인도 보통석의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용기가 아니고 정통 샴페인 잔에 " Thai " 라고 고급스럽게 음각된 잔 받침에 받쳐서 가져다준다. 그걸 마시니 다음은 샐러드. 보통석의 말라비틀어진 배추꼬랑이가 아니고 양배추를 가로, 세로, 사등분해서 배추속이 피아노 줄처럼 엄청 가지런해 주방장의 지극한 정성이 그대로 내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들을 먹는 고급 포크, 나이프가 두 벌씩이나 제공되어 나왔다. 샐러드용과 주 요리용으로, 아주 격식을 갖춘 고급식당, 한국 테헤란로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처럼 말이다. 주 요리는 고추양념을 얹힌 고급 부위 쇠고기 요리에다가 국수, 야채 삶은 것, 아주 잘 구운 뜨끈뜨끈한 롤 빵 두 개, 마늘 빵 한 개, 건조한 검은 빵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것 맘껏 골라서 드시라고 바구니에 잔뜩 담아서 제공되고 버터는 물론 치즈에 딸기 잼, , 크래커까지 나왔다.

 

나는 백포도주를 곁들여 아주 맛있게 한 조각, 한 첨, 한 부스러기까지 의식을 치르듯 정과 성을 다해 먹었으며, 먹을 때마다 앞 턱 치마를 이용하여 입 양쪽 가장자리를 닦아내곤 하며 일등석 승객의 위엄을 갖추었다. 백포도주는 불란서 1993년도 산 Pouilly Fuisse를 선택해서 먹었으며 후식으로는 진한 밤색 초콜릿에다가 카듈라 리큐어 한 잔을 시켜 마셨다. 아 그런데, 이 글을 쓰다가 너무 좋아 혼자 히죽거리다가 손으로 술잔을 툭 쳐서 카듈라 반 이상을 엎질러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허? 맨 날 일등석 타는 내가 이런 실수를.. 먹을 만큼은 다 먹어서 서운하지는 않았지만 허둥대는 나의 이런 모습이라니.. 달려온 여승무원은 오히려 자기에게 또 다시 봉사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는 모습으로 식탁을 새로운 식탁보로 다시 깔아주고 의자 위의 술 흔적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닦고 또 닦아주었다. 타이 승무원 특유의 향내가 내 코에 자극되어오니 그 또한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등석 여승무원이 가고 나서 앞 바지 밑이 끈적거려 보니 엎지른 카듈라가 바지에 그대로 묻어있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그걸 닦으려다가 말고 깜짝 놀랐다. 지금 나의 이 복장이 일등석 승객의 복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20년이 넘은 빛바랜 서울 변두리 저질 청바지에다가 누가 보아도 가짜임이 분명한 피에르 카르뎅 글자 새긴 시장바닥의 하얀 양말, 주공 7단지 새마을 야시장에서 산, 15년은 족히 넘은 꿀벌 궁뎅이 무늬 누런 반팔 티셔츠.

 

   어딜 보나 내가 일등석 손님 같지 않다는 나의 깨우침이 있자 나는 그 동안의 환상에서 깨어나 스멀스멀 어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자리가 어색해지기 시작하고 주위의 다른 승객들의 수군거림이 내 귀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지금까지의 그 일등석 여승무원의 나에 대한 친절은, 오늘 모자란 보통석 손님을 일등석 손님으로 한번 테스트 해보아 자기의 비호감 승객에 대한 친절도를 시험해 보는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러자 불안해졌다. 옆자리 그럴싸한 일등석 승객들의 존재가 날 주눅으로 몰고 갔다. 그러자 나는 나의 보통석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다. 20여 년 넘게 정이 든 내 본연의 자리, 보통석 이코노미석으로. 비좁아서 비척거리고, 코고는 놈 있어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것 같은 특유의 편함이 있는 곳, 이코노미 좌석으로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4시간 여 내 마음을 빼앗았던 그 일등석 여승무원이 착륙점검을 위해 통로를 걸어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또 상냥하게 말을 걸어온다. “ 편하신 시간이었나요? ”. 이유야 어떻든, 나는 맨 날 일등석 타는 승객처럼, 불만이 있어도 안 그렇다고 해야하는 예의 바른 두등( 頭等 ) 승객의 미소로 화답을 해주고,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비행기의 기수가 하강을 위해 낮추질 때, 입에 물고 있던 샤프 연필을 빼서 주머니에 넣으며 가만히 속으로 뇌였다. 누가 뭐래도 내 자리는 삼등석인가 봐...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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