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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서울 행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등록일 2016.09.28 04:43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10




서울 행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축제는 끝이 났다 . 사월의 셋째 주 일요일, 전주 군산 벚꽃 105리 뜀길에 수놓아졌던 살아 쉼 쉬는 자들의 신명 나는 한 판 마라톤 축제는 이제 끝이 났다. 아침나절, 못자리판 갈무리하던 주인 집 상머슴이 허리를 펴고서 마을 어귀 바라보며 아침참을 기다리고 있을 그 시각 오전 10, 한 무더기의 펄펄 살아 숨 쉬는 뜀꾼들이 어깨를 다 들어 내놓고 무쇠 같은 알 다리로 전주 군산 전군가도 번영로로 쏟아져 나와 전주를 향해 뜀질을 시작했다. 만경평야 하늘 위에 떠오른 태양이 아침 내내 숨어있던 구름 속에서 나와, 달림이들의 양 볼과 목, 정수리를 공격했다. 어제 내린 비에 화려했던 벚꽃 잎들이 수북이 떨어져, 가락동 수산 시장 물고기집 칼도마 밑에 쌓인 잉어 고기비늘처럼 번영로 마라톤 뜀길 내내 내달리는 발길 밑에 깔려 있었다. 그렇게 길게 이어진 42.195km, 105리 뜀길 오늘의 마라톤 축제는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의 귀로에 오르기 위해 전주의 고속버스 정류장 이층 대합실로 갔다. 의자는 주황색 플라스틱으로 다섯 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나의 다리 근육은 한 겨울 질퍽대는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얼어붙은 싸리비 가닥처럼 윤활성을 완전 상실한 채 경직되어,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많이 피곤하였다. 고속버스 출발 시각과는 책장 여 닐 곱 장 읽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배낭의 지퍼를 열어 꺼내기가 귀찮아 그대로 멍하니 앉아서 초점 없이 눈망울만 굴리고 있었다.

 

   그 때 그 사내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머리는 대개의 운동선수들처럼 짧게 깍은 스포츠형이었으나 깍은 지가 열흘은 족히 넘은 듯, 머리칼 여기저기가 쭈뼛쭈뼛 전체적으로 몹시 스산해 보였다. 아주 먼 곳에서 이곳의 마라톤 대회 참가를 위해 왔고, 뛰었고, 이제 이곳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길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그 사내의 독특한 전체 모습이 내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그 사내의 고단하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꼿꼿함에서, 오늘 하루 햇볕에 노출되어 붉게 탄 얼굴이지만 빛남을 잃지 않은 눈망울에서, 주로의 급수대에서 물컵을 나꾸어채다 흘려서 묻혔을 젖은 운동화에서 그 사내의 오늘 하루 뜀질에 대한 고단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내는 고속버스 매표소 매표창구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행선지 안내 표시를 확인하고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줄의 맨 뒤를 확인한 후 어깨에 멘 배낭을 한번 풀썩거려 올려 메고 그 뒤에 가 서 있었다. 기타 행선지 매표소 앞에 서 있었음으로 그 사내의 행선지는 서울이 아니었다. 그 사내는 매표창구 위에 있는 검정 바탕 사각 틀에 붉은 색으로 불이 켜진 싸구려 디지털시계를 가느다랗게 두 눈을 모으고 바라보고 서서, 앞으로 당겨지는 매표창구 줄을 따라 가만가만 움직였다. 다른 표정은 일체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차례가 되자 그 사내는 오른 다리를 반쯤 들어 기역자를 만들더니 그 위에 자기 배낭을 올려 지퍼를 열고, 반으로 접혀있는 지갑을 꺼내 지폐를 창구 속으로 들이밀면서, 짧게 행선지를 말했다. 그 사이 들어 올린 오른발의 무게 중심이 약간 기우뚱거리며 흔들리니, 그 사내는 재빠르게 들지 않은 왼쪽 다리에서 발뒤꿈치와 앞부리를 좌우로 짧은 시차를 두고 움직여서 몸의 자세를 다시 잡는 기민함을 보였다. 승차권 인 듯 사각 종이가 그 사내의 손에 건네지자 그 사내는 매표창구를 떠나 대합실의 한적한 곳에 이르러 서서 배낭을 내려놓아 자기의 양다리 사이에 걸쳐놓고, 방금 받은 승차권의 인쇄내용을 검토하는 듯 했다. 아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가보다. 오른 손 손가락 검지로 표의 인쇄 부분을 짚어가며 내 추측으로는, 도착지 이름과, 출발시각, 좌석번호, 출발일 그리고 방금 지불한 금액을 확인하는 듯 했다. 점검이 끝났는지 그 사내는 그 승차권을 반으로 접어 트레이닝 상의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목 바로 밑까지 끌어올리며 그렇게 하려고 약간 올렸던 목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그 사내는 내가 앉아있는 대합실 의자 바로 앞, 주황색 플라스틱 의자에 자기의 몸을 조심스럽게 주저앉히고서 몸을 앞으로 숙여,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자기 두 발 사이에 내려놓았다. 왼발 오른발을 동시에 안으로 당겨 좁혀서, 너무 넓은 배낭의 폭 때문에 벌어지는 두 다리 간격을 좁히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버스 출발 시각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들어갔다. 지근거리에서 그 사내를 줄곧 바라보던 나는 이제 나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다.

 

   아! 저 사내는 뜀꾼이다. 이 시대의 외로운 그렇지만 절대로 외롭지 않을 것 같은 뜀꾼이다. 오늘 하루의 마라톤을 끝낸 그에게 뛰는데 걸린 시간 이야기는 얼마나 무의미하며 오늘 뜀길의 고저는, 난이도는 무슨 상관이더란 말인가? 그저 오늘의 마라톤은 끝이 났으며 다음의 마라톤은 언제, 어디에서 있을 것인가, 오로지 이것만이 그 사내의 관심일 것이다. 그는 조용히 바람처럼 와서, 마라톤 대회장 특유의 그 냄새에 두 눈 감고 코를 한번 벌름거려보고, 출발지 운동장 스탠드 높이에서 펄럭이는 대회장 깃발을 보며 바람의 힘을 확인하고 그리고 구석에 혼자 앉아 운동화 끈을 조이고, 출발 총소리가 울리면 무리 속에 끼어 혼자만의 고독한 질주를 했을 것이다. 완주선 에서의 환희도, 뜻 모를 고함도 전광판 마라톤 시계의 빨간 숫자도 그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저 조용히 와서 조용히 뛰고 입고 왔던 옷 다시 찾아 어깨에 걸치고 생수 한 병 얻어 마시며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게 그가 하는 유일한 완주 후 의식이 아닐까? 바람 지나간 한참 후 쓰러지다가 다시 일어나는 보리밭의 잔물결처럼, 그가 지나간 한참 후에야 우리는 그가 왔었음을 알게 되는, 바람 같아 닮고 싶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뜀꾼이 아닐까?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나는 그가 눈을 뜨면 다가가서 악수를 청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사내의 얼굴에 내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내는 미동도 않고 돌부처처럼 곧은 자세로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산지 오래된 운동복이 그 사내의 몸에 걸쳐져 있었지만 그 사내의 몸 자체에서는 기품이 많이 배어 나오고 있었고 뭔지 모를 꾼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향내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사내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이 사내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간 얼마나 뛰었으며 기록은 얼마나 될까? 이 사내는 왜 혼자서만 마라톤 대회장을 찾게 됐을까? 얼마마한 고수가 되면 나도 저러한 귀티를 가지게 될까? 벚꽃 만발한 전주, 군산 간 마라톤이 끝난 오늘 오후, 고속버스 출발 대합실에서 만난 어느 뜀꾼, 이 사내. 지방 어디에서 홀연히 나타나 바람처럼 뜀질을 마치고 흔적 남김없이 내려가는 이 사내, 나는 그에게 마라톤의 도 경지에 이르는 길을 물어보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 둔탁한 중년 사내의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서울행 고속버스 출발의 임박을 알리며 개찰구로 나오라는 방송이었다.

 

   나는 내 안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던 서울 행 승차권을 검표원에게 내밀어 보이면서 다시 한 번 더 그 사내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미 해 기울어 긴 그림자 끌고 있는 이층 대합실 쪽, 그 사내가 아직도 주황색 플라스틱 긴 의자에 앉아있는 곳을 올려다보고는 서울 행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옮겨 실었다. 내가 닮고 싶은 바람결 같은 한 뜀꾼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으로 몸체가 긴 서울행 고속버스가 출발 홈에서 천천히 뒷걸음칠 때 나는 또 한 번 그 사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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