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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무념무상, 등록일 2016.09.30 04:28
글쓴이 박복진 조회 1890




무념무상,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아침 뜀길에서 홀로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나는 나 나름대로 한 가지

내공을 쌓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게 있습니다. 가급적 나의 뜀질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해 보자! 도 닦는 도인처럼 훠이, 훠이 뜀질 하나에만 빠져보자! 입니다.

나의 이 시도가 열매를 맺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예를 들면 어느 순간 나의 머릿속 어떤 생각이

뚝 끊기고 2-3 킬로미터씩 그냥 공중의 허깨비처럼 달려가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갔으면 좋으련만, 어느 순간부터 다시 인생사 온갖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옵니다. 정신수양이 많이 부족하지요.

 

   비가 그친 어제 오후, 복장을 챙기고 강변길 뜀질에 나섰습니다. 강바람이 으스삭, 으스삭

나를 밀쳐보다가 자기가 밀려 뒷걸음질을 하는 지극히 평온한 뜀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가끔씩은 서서히 무념무상의 경지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아래만

내려다보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을의 서곡인 양 풀벌레 울음소리만 내 옆을 스치는,

달리는 감각만 살아있는 무념무상의 초기단계인가 봅니다. ,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래, 이렇게 한 20킬로미터만 달려보자! 라며 스스로 작은 흥분이 일었습니다.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자기 품에 안긴 여인의 황홀경을 한 눈 지그시 감고 감상하듯,

나는 그렇게 아래로 처박은 고개 그대로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이제라도 진입할 듯,

진입할 듯 하는 무념무상의 경지 문턱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상태로 얼마나 왔을까? 가 너무 궁금하여 나의 고개가 살포시 들리어진 순간,

나의 눈에 어떤 장면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나의 설익은 무념무상의 실체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내가 뛰고 있는 한강 둔치 뜀길에 두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일 충분한 무념무상의 내공을 쌓았다면 모른 척 하고 그냥 지나쳐야만 했던 그 장면을

나는 다섯 번도 더 고개를 돌려보았고, 거리상으로 나 시간상으로나 이미 잊을 법도 했던 그

장면을 나는 남은 뜀질 내내 생생하게 머릿속에 담고 뛰었습니다. 이미 깨져버린 무념무상의

경지, 오늘도 글러버렸습니다.

 

   우선 그 장면은 너무나 진지했습니다. 달리는 내가 무념무상의 경지를 찾았다면, 껴안고 있던

두 남녀도 아마 그런 경지를 찾았나 봅니다. 분명한 것은 그 두 남녀는 아주 쉽게 그 지경에

도달하여 꽤 오랫동안 즐기는 중이었고, 나는 수 년 째 그 지경을 추구하였으나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 두 남녀는 30대 후반으로 부부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부부가 그 시각

한강변에서 그렇게 진하게 애정표현을 한다는 게 참 상상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우선 그 여인의 자세는 교태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시멘트 난간 계단에 앉은 사내는 오히려

수동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반면, 그 남자의 두 다리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는 남자의

목을 휘감고, 또 다른 한 손은 남자의 넓은 어깨 휘익! 돌아 거의 반대편 겨드랑 속까지 기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내가 고개를 들었던 그 한순간에 다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을 처음 보게 되어 급히 고개를 다시 처박았지만, 그럴수록 나의 세속적 궁금증은 더해

가서, 두 세 뜀도 못 가서 나의 고개는 또 다시 그 두 남녀에게로 돌아갔고, 그러고 나서 괜스레

나의 얼굴이 붉어져 나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서 또 몇 걸음을 나아갔고 그리고 또 다시 고개가

들리어져 다시 바라보았고, 그리고 또 다시..

 

   입맞춤도, 내가 보기에는 여자가 단순히 자기 입을 갖다가 대어 맞추는 그런 자세는 아니었

습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전사가 춤을 추며 내미는 그 긴 혀보다도 더 길게 빼문 그 여인의

혀가 몽땅 남자의 입속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그 여인의 고개는 이미 황홀경 내부 깊숙이

들어간 듯, 두 눈은 다 감고 고개는 삐딱하니 옆으로 15도 이상 기울은, 그야말로 원초적 두 이성,

남과 여가 가져볼 수 있는 최상의 엑스터시 상태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못 본 엄청

대범한 자세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에서 여인의 자세가 수동적이었다면, 여기

이 여인은 그 작품의 황홀경을 더 잘 표현하려면 이런 자세이어야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매우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자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소위 빈티지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허리띠 없는 허리선의 고리는 오래 전에 풀린 듯, 말만 바지지 이미 바지로써의 기능은 상실한

듯 보였습니다. 그 안 내부의 속옷도, 있어야 할 자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듯, 하얀 골반에

남아있어야 할 빨간 고무줄 흔적이 다 펴지고 사라져, 하얀 속살 허리와 둔부의 경계가 높은

굴뚝 끝의 마지막 장작 연기처럼 오래 전에 날아가 흩어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두 다리

위에 폴짝 올라탄 그 자세는 LPGA를 처음으로 석권한 여성골퍼가 감격한 나머지 한 홀을 뛰어가

자기 두 다리로 남자 캐디 허리를 후익! 감아 안기는 그런 종류의 자세보다 더 힘 있게 꼰 그런

구애의 자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자세를 오랫동안, 옆에서 뛰어 가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나를 의식했다 하더라도 내가 뛰면서 그토록 추구했던

무념무상의 경지가 그 의식을 누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몇 년 째

토록 뛰면서 도달해 보려고 무수히 많은 날 죽어라고 노력했던 완전한 무념무상의 경지에

아직도 도달치 못 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흐르는 한강 옆에서 백주 대낮에 구렁이처럼 서로

칭칭 감아 끌어안고 있던 불륜현장의 그 두 남녀는 참새 혓바닥 끝 돌기 하나만큼의 별도

노력 없이도 쉽게 그 도에 이르러, 그곳을 지나던 착한 달림이 내 시선을 몽땅 빼앗아갔고,

그런 내공을 쌓으려 오늘도 무지 노력해온 나의 노력을 일격에 수포로 만들었다는 사실.

 

   무념무상의 뜀질, 그건 아무나,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그

근처에 왔을 때, 이미 없어진 그 두 남녀의 흔적을 무엇에 홀린 듯 또 다시 찾아보며 달리는

속도가 늦어지는, 나는 어쩔 수 없는 그저 그런 속물근성의 보통 달림이인가 봅니다. 집 앞

근처에 이르러 오늘의 뜀질을 마감하는 정리 단계의 숨고르기에서 나는 가만히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가만있자, 내가 본 오늘 아까 그 장면은 어쩌면 허깨비가 아니었을까? 나야말로 오늘

진정한 무념무상의 달리기 경지에 들어갔다 온 것은 아니었을까? 내 무념무상의 세상에 그런

욕구가 내재되었다가 허깨비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나의 오래된 달리기 화두, 무념무상

으로의 도전은 내일도 계속 됩니다.


춘포

박복진

faab  마라톤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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