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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어느 시골 할머니 등록일 2016.09.28 05:17
글쓴이 박복진 조회 1960



식전해장에 왜 뛴디아?                         

 

나는 한적한 새벽 시골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굳이 행정적으로 위치를 밝히라고 하신다면, 아마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맹리? 혹은 운산리? 정도가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조금 전 지나온 시골버스 간이정류장 표지판을 힐끗 보았거든요. 화살표 끝에 쓰인 맹리의 맹자와 운산리의 운자에서 이응을 동그라미가 아니고 옆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에 가깝게 써놓은, 촌티 많이 나는 정류장 표지판을 말입니다. 포장한지가 얼마 되지않 은, 그렇지 않다면 포장은 꽤 오래 전에 하였으나 차량통행이 너무 뜸해 포장된 그 상태로 아직도 짙은 흑색을 유지하고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앞, 국도 왕복 2차로 신작로입니다. 중앙선이라고 도로 중간에 노란 실선을 그어 놓았는데, 새벽안개로 적당하게 촉촉이 젖은 모습이 금방 도색한 것 같습니다. 그 위를 달리는 내 운동화에 노란색 물기가 빨아올려진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며 확인해보고도 싶어집니다. 적당한 간격으로 부드럽게 구부러진 시골 신작로. 동네 초입에 동네 이름을 새겨놓은 커다란 돌 표지석들. 누구라도 쉽사리 동네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해 주는 늙은 느티나무. 그 아래 짙은 검정 기와에 하얀 석회 칠을 한 마을 노인들의 조그만 팔각정 쉼터. 나는 이 평화스런 수채화 속을 달리기가 아닌, 부드러운 수영을 하는 기분입니다.

 

저쪽 동네입구에서 막 걸어 나오는 칠순 정도의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이곳 시골 현지인입니다. , 반가웠지요. 어제 차를 몰고 이곳 동네입구를 오다가 발견한 너무나도 정감 있는, " 문화 이발관 " 이라는 간판을 보았을 때처럼 많이 반가웠습니다. 나는 달리면서 인사를 하려고 마른 목을 한번 침으로 축이고 나서, 쓰고 있던 야구 모자 차양을 살짝 올렸지요. 인사를 해도 시골 할머니 특유의 무관심으로 대꾸를 못 받아 약간 머쓱할 수도 있겠으나, 뭐 대수겠습니까? 그래도 내 할 도리는 해야지요. 고요한 새벽 시골 신작로. 달리고 있던 나와 마실 나가는 동네 할머니와의 우연한 마주침, 뭐라고 인사를 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어디가세요? 할머니 이른 새벽에 어디가세요? 아니면, 할머니 안녕하세요? 나는 금방 적당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아 달리던 두 다리가 조금 엇박자 되었습니다. 너무 구체적인 인사면 처음 보는데 건방진 것 같고, 그냥 안녕하세요! 하면 수돗물 먹는 되바라진 서울 놈 같고. 더 잘해서 산삼 캐려다가 오히려 더덕 캐는 꼬라지 되는 것은 아닌지.

 

별것도 아닌 것에 신경을 쓰며 맥없이 모자차양을 다시 올리며, 내리며 하는 사이 우리 둘의 간격은 이제 서로 두 얼굴을 빤히 볼 수 있는 매우 가까운 거리로 좁혀졌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은 이마와 양 볼에 짙은 주름이 있고 키가 매우 작은, 아주 온화한 얼굴이었습니다. 깊은 이마주름은 펴질 때가 극히 드믄 듯 눈을 아래로 뜰 때, 햇볕을 전혀 받지 않은 주름 속 속살은 하얀 살색 그대로였습니다. 이마와 볼 등, 들일로 인한 나머지 전체 얼굴의 구릿빛 색깔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마치 간판집에서 음각으로 글자 써놓고 그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 뿌린 뒤, 그 글자판 걷었을 때 간판의 페인트 글자 색과 스프레이 안 간 바탕처럼 차이가 선명했습니다. 치마는 아래 발목부분에 고무줄이 들어간 몸빼 같은 것이었는데 연한 분홍 색깔이었습니다.

 

순진해서 수줍음 많을 것 같은 그 할머니가 터억 하니 달리던 나의 옆에 서더니, 지금까지 첫 인사말 하나로 고민하던 나의 망설임이 가소롭다는 듯, 인사는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듯,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툭! 일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던 두 다리 모으고, 나이 들어 많이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맞잡은 두 손 깍지 끼어 허리 뒤에 대고,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며 당당하게 먼저 건넨 인사말은 내가 전혀 상상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 , 왜 뛴디아? 식전 해장에 왜 뛴디아? "

 

그냥 혼자 하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묻는 말도 아니고. 대답을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양단간에 어느 쪽이든 내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 것이고. 혼자 독백 비슷하게 하는 것이니 그 인사가 틀렸다고 시비꺼리 될 리 없고. 궁금하니 말 조까 해달라는 뜻도 있으나 정식 요청은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이 서로 길거리에서 지나치는데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보다는 더 친근감 있게 인사를 하겠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닝께로.

 

할머니는 새벽에 처음 마주치는 이방인과의 첫 인사법을 잘 알고 계시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궁금증을 표현하는 법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덤으로 내 어릴 적 많이 듣던, "식전 해장" 이란 죽어있던 단어도 다시 캐내어 들려주며, 속 알맹이는 없지만 그래도 꽉 찬 여운으로 나를 미소 짓게 만든 멋진 인사법을 아시고계셨습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런 인사를 던진 할머니도 나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인사를 던져놓고 나의 반응이 궁금해서 나를 향해 뒤를 한 번 돌아보고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묘했던 할머니의 첫 인사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겁나게 푸른 남쪽동네 시골 신작로를 오던 속도 그대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당황해서 내가 미처 못 했던 대꾸,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 인사에 100% 맞장구가 될 완벽한 내 인사를 떠올렸습니다.


 “ 긍게 말이요, ! ”


춘포

박복진

( faab  마라톤화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