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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본] 몽마트 언덕의 여학생 등록일 2020.09.22 07:21
글쓴이 박복진 조회 763

몽마트 언덕의 여학생            

 

   쉴 사이 없이 사람들은 계단을 올라가고 또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큰 무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작은 무리도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트 언덕을 올라가는 돌계단은 그 인파를 다 수용하며 가만히 등을 내주고 있었다. 그 중간쯤에 동양에서 온

한 여학생이 계단에 앉아 있다. 시선은 파리 시내 건물들의 지붕이 만든 선을 감상하는 듯하였으나 생각은 눈과 일치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청바지에 한글 로고가 찍힌 간단한 민트색 티셔츠, 그리고 배낭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끌어안은 여학생의 모습을

지나가는 관광객 거의 모두가 한 번씩 바라보고 지나갔다. 언덕 맨 위의 사크레쾨르 성당과 그곳에서의 파리 시내 조망 등을 다

보고 내려오는 중이었는지, 이제 올라가는 중인지 앉은 자세로 보면 분간키 어려웠다. 아까 올라가면서 이 여학생을 보았던 한국인

관광객 부부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또 이 여학생을 보자 말을 걸었다. 학생! 한국에서 왔나 보네? 혼자 왔어? 근데 우리가 올라갈 때

 봤는데 여태까지 있네. 서울에서 왔어? 그러자 그 여학생은 해가 얼굴에 안 비치게 고개를 약간 돌리며 모국어로 말을 걸어온

아줌마에게 여고생다운 앳띤 웃음으로 화답을 했다. 그리고 오늘 발품으로 다리가 아파 이참에 계단에 잠시 앉았다 가려는 이 부부에게

조용조용 말을 풀어냈다. 때로는 파리의 하늘을 보며 때로는 성당의 둥근 돔을 바라보며 때로는 피아노를 잘 칠 것 같이 보이는 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때로는 말을 끊고 그 막간을 정적으로 이어가면서 꽤 길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영화 촬영기법으로 끊김 없이

한 번에 찍는 롱 테이크처럼 카메라가 이 여학생 머리 위에서 360도로 계속 회전하는 착각이 일었다.

 

   네, 이번 여름방학을 맞아 혼자 왔어요. 해외여행은 처음이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유럽 여행이에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유럽에

관해 많이 듣고 자라서 이미 와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저의 할아버지는 저를 아주 예뻐하셨는데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무역으로

다니셨던 곳 중 이곳을 특별히 좋아하셨나 봐요. 이곳에 대해 꽤 많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네가 어서 자라서 혼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가봐야 할 유럽의 여러 곳 중 한 군데가 여기 프랑스라고 말씀하시면서 후딱 가서 후딱

사진 한 장 찍고 떠나는 것보다 적어도 한곳에서 2-3일 정도씩은 있어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여기 몽마트도 눈에 비치는 외관이

아닌 이곳만의 속살 정취에 흠뻑 빠져보려고 오늘부터 3일 동안 있을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의 시선이 어디로 뻗쳐서 어떤 감흥을

솎아내어 집으로 가져오셨는지 여기 계단에 앉아서 그 숨은 그림들을 찾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댁 소나티네 식탁에는 의자가

네 개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자주 앉으시는 서향 창가쪽 의자 뒤에는 이곳에서 사오셨다는 조그만 유화가 한 점 걸려있어요.

아마 여기 뒤쪽 골목의 어느 조그만 카페 그림인 듯 해요. 지금도 있다면요. 이따가 그 카페를 찾아보려고 할아버지 댁 그

액자의 사진을 찍어왔어요.

 

   할아버지 전원주택은 시골 양평 언저리에 있는데 소나티네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소나타보다 더 작은 음악의 악장, 소나티네.

그곳에 가면 제가 처음으로 한글을 깨쳐서 쓴 글씨체의 택호가 대문간에 키 작은 입간판으로 서 있어요. 또 핀란드산 통나무로 지은

 작은 통나무 별채가 있는데 비스듬한 나무 계단을 9개 올라가면 다락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그 다락문 입구에 제 이름 시우 비밀의 방이라고

명명해 써서 달아주시고는 제가 볼 수 있는 책들로 채워주셨어요.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해외를 돌아다니시면서 사오신 여러가지

장난감이나 기념품들이 많았는데 덴마크에서 사오셨던 인어공주도 있어요. 영국의 옛날 돌집도 있고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든

공주의 이마에 입을 맞춰서 깨어나게 해준 왕자님도 있어요. 모두가 제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것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린 저에게

나중에 자라서 넓은 세상을 알게 해주시려고 안에 불이 환히 들어오는 커다란 지구본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자주, 자주 말씀해 주셨어요.

아가야, 여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요리, 요리 날아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나온단다! 하시면서 그저

저에게 다른 세상, 다른 모습을 더 빨리 더 많이 알게 해주시려고 많이 애쓰셨어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믿고 계셨어요.

시우야, 세상에는 좋은 옷이 많이 있고 맛나는 게 많이 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입는 것, 먹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 오감을 통해 네가 접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네가 그동안 쌓은 지식으로 이를 받아들여 네 것으로 만드는, 그래서 다시 이를 너만의 방식으로 즐기며 표현하는

능력이란다. 글이 될 수도 있고 음악이 될 수도 있고 그림이 될 수도 있지. 그러려면 우선은 이 넓디 넓은 세상을 될수록 많이 보고

느껴야 된단다. 그러시려고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통장을 하나 만드시고 저를 위해 지금껏 조금씩 조금씩 적금을

부어주셨어요. 할아버지가 17년 동안 모아주신 그 돈으로 저는 지금 해외 첫 여행을 떠나 여기 프랑스 파리가 첫 여행지이고,

몽마트 언덕이 첫 방문지예요. 할아버지는 국, 내외로 유명한 울트라 마라토너이신데 생업으로는 마라톤 신발을 만들어 파셨어요.

지금도 하세요. ‘하늘을 나는 새의 자유라는 뜻의, free as a bird 두문자, faab 라는 유명한 국내 상표예요. 그 신발을 파셔서

부어주신 적금으로 제가 여기 온거예요. 17년 동안 모은 돈으로요. 제 할아버지가요...

 

   그때 컴퓨터 모니터에 이체 하시겠습니까?’라는 문귀가 톡! 튀어나왔고, ‘확인이 아래 이어졌고 나는 마우스 오른쪽을 눌렀다.

그러자 이체가 완료되었습니다! 라고 떴다. 이제 앞으로 9년 정도 이런 식으로 조금씩 더 넣으면 우리 손녀 시우가 이 돈으로 꿈많은

여고생 때 별도 몫돈 마련 고충없이 해외여행을 갈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혼자서 미소 지으며 인터넷 송금이 끝난 컴퓨터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오늘 내 나이 칠십, 자축 칠순 기념70km 마라톤을 위해 홀로 우리집 대문을 나섰다.

 

춘포

박복진

대한민국 뜀꾼신발 faab 마라톤화 대표

2020.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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